학술   20세기가 21세기에게 _ ⑦ 정치학


역사 속의 정치학

동서양을 막론하고 위대한 정치사상가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개인의 ‘좋은 삶’이 ‘좋은 정치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지혜를 체득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고대 그리스 시대에 살아가던 정치사상가들은 당대의 자유로운 정치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주변의 여러 도시국가들에서 채택되던 정치제도들을 상세히 검토하고 비교분석했고, 이는 어떤 정치질서가 최상의 정치질서인지에 대한 체계적 논의의 출발점이 됐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다양한 형태의 정치체제의 장·단점을 검토한 끝에, 여러 사회계층의 정치참여를 보장하는 혼합정이 공공의 이익과 개인의 덕스러운 삶을 동시에 성취하게 하는 최상의 정치체제임을 주장했다.
토머스 홉스(1588~1679)를 필두로 한 근대정치이론가들은 고전정치철학의 목적론적 세계관에 반기를 들며 ‘덕’과 ‘공공선’을 강조하는 고전적 관점은 근본적 가치나 이해관계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폭력적 갈등을 해결할 수 없음을 지적하고 나왔다. 때문에, 홉스는 모호하고 이상주의적인 덕-중심의 정치관이 아니라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동의할 수밖에 없는 기반(예컨대 생명의 보호)으로부터 정치질서의 정당성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급진적 제안을 내세웠으며 이는 근대 정치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사회계약론(모든 정치질서의 정당성은 구성원들의 자발적 동의에 기초한다)의 탄생을 알렸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은 사회계약론에 기반한 인민주권의 원칙(국가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다)을 확립했다. 혁명을 통해 왕정을 철폐한 혁명세력은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 중심의 새로운 정치체제를 설립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혁명 이후의 대의 민주주의 체제는 정치적 안정을 달성하기보다는 급진혁명세력의 공포정치와 의회독재 체제로 귀결됐다. 뱅자맹 콩스탕(1767~1830)을 비롯한 당대의 사상가들은 프랑스 혁명의 이와 같은 비극적 결과의 원인을 ‘무제한적 인민주권’의 추구 및 ‘민주주의’의 이름을 내세운 국가권력의 무제한적 팽창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들 개혁주의 이론가들은 개인의 기본권을 최대한 존중하며, 국가 권력기관들 사이의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확립함으로써 국가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것을 추구하는 자유주의 정치사상을 발전시켰다.


전체주의·나치즘 vs 입헌민주주의

19세기를 거치면서 서구의 대부분의 나라들은 왕정을 폐지하고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채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치적 참정권의 범위도 소수의 유산계층에 국한되던 것에서 넘어서서 노동계급을 포괄하는 방향으로 확장돼 갔다. 그런데 이러한 민주주의의 확산이 역설적이게도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끔찍한 비극 가운데 하나인 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독일제국에 의한 민간인과 전쟁포로의 대학살)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대중 민주주의가 가진 양면성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유태계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된 독일 전체주의의 이면에는 강력한 민족주의 정서와 더불어 파편화되고 사회적 관계망을 상실한 개인들이 거대한 군중/폭도로 변하는 과정이 있었다고 분석한다. 히틀러와 같은 민중선동가들은 대중의 이러한 분노를 활용해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대의 민주주의 제도를 마비시켰다.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서구사회는 ‘통제되지 않은 인민주권’의 위험성을 절실하게 깨닫게 됐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직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민주주의는 헌정주의의 견제와 균형, 법의 지배, 소수자의 권리보호, 헌법재판소 신설 등의 다양한 제도적 안전장치를 도입함으로써 민주적 정치질서의 안정화에 노력을 기울였다. 프린스턴대의 정치이론가 얀 베르너 뮐러(1970~)는 이를 ‘제약된 민주주의’라고 명명한다. ‘법의 지배’ 혹은 ‘소수자 권리보호’라는 자유주의적 가치의 보전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다수의 횡포를 제도적으로 방지하는 ‘제약된 민주주의’ 체제가 가진 긍정적인 기능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뮐러가 지적하듯이 전후에 도입된 ‘제약된 민주주의’는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은 헌법기관(대표적으로 헌법재판소)들에 지나치게 큰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인민주권의 원리에 과도한 제한을 가한다는 반발도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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