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OU광장   마로니에

기억해. 너는 괜찮은 녀석이고, 의미 있는 책이라는 걸.

앞으로 만날 많은 사람들에게 너는 새로운 기회를,

꿈을 이룰 희망을 주는 고마운 존재라구.

 

요즘 긴장된 순간을 보내고 있겠지. 너는 3월에 나를 만나 눈코뜰새 없이 내지 편집디자인, 확정 과정을 거쳐 지면에 몸을 옮기기 위한 조판 작업을 마쳤고, 이제 막 첫 번째 출력된 교정지가 되어 초교라는 과정을 거치고 있으니까. 빨간색 펜, 파란색 펜을 든 사람들이 네 몸 여기저기 찌르고, 잘라내서 바꾸어 다시 넣는 과정이 편안할 리 없지. 매년 봄가을로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다 너를 위한 거라는 변명 뒤에 숨어서 나를 위안해.

진심을 담지 않은 말과 글은 저 사람에게 가 닿지 못하더라. 자기를 위안하는 변명은 더 그렇겠지. 그리고 마음에만 담아둔 진심을, 저 이는 알 수가 없어. 사실 이 글은 너에게 쓰는 두 번째 편지야. 네가 앞으로 어떤 과정을 거칠지 알면 좀 더 편안하게 이 시간들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한껏 밝게 네가 앞으로 어떤 길을 가게 될지 수다스러운 글을 썼는데,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 이게 정말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인가 싶고. 그래서 다시 쓰고 있어.

초교 중인 너는 또다시 거의 해체되다시피 해서 2교지가 되고, 또 수정을 거친 후에 3교지가 되고, 시간이 허락되는 한에서 4교지가 되어서는 표지라는 옷을 입고 세상으로 나가게 돼. 그것도 급히, 서둘러서 말이야. 너는 이미 태어나기로 약속된 날이 있거든. 마냥 네 문장들에게, ‘그래 너는 어떤 단어가, 표현이 마음에 드니? 이 부분은 좀 잘라내면 더 깔끔해질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으면 좋겠지만 때가 되면, 또 어쩔 수 없이 나는 펜을 놓고 다음 단계로, 다음 사람에게로 너를 넘겨야 해. 미안한 마음으로 다짐해. 이 순간 최선을 다하자고.

기억해. 너는 괜찮은 녀석이고, 의미 있는 책이라는 걸. 앞으로 만날 많은 사람들에게 너는 새로운 기회를, 꿈을 이룰 희망을 주는 고마운 존재라구. 물론 네가 좀 어렵고, 그래서 슬퍼할 사람도 있을 거야. 하지만 네가 포기하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해서 해 나간다면, 소곤소곤 너의 목소리가 들린다면 사람들은 다시 귀를 기울이게 될 거야. 그러니 용기를 가지고 꾸준히, 너의 길을 가고 네 일을 해. 그것이 네가 몸이 해체되고 깎이는 고통을 감내하는 이유, 내가 그 과정을 돕는 목적이야. 너는 꽤나 특별한 위치에서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는, 독특한 존재란다. 그러니 책등을 곧게 펴고 자부심을 가져.

늘 너를 돕는 것이 일상인 나는 올해의 너를 생각하면 좀 걱정이 돼. 유난히 일찍 온 봄에 꽃들이 숨넘어갈 듯 다급하게 피어나는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지쳐 있고, 우울한 기운은 세상을 덮쳐버렸어. 이 우울함이 행여 너의 모든 자모에, 페이지에 먼지처럼 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면 어쩌나 나는 염려가 되는구나. 여름에 나올 너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겠지만 모든 시간은 흔적을 남기니까. 더군다나 교재 사용기간이 6년이다 보니 너는 태어나면 그 시간을 그 몸 그대로 살아내야 해. 더위와 추위, 습기와 바람, 사람들의 일상을 맞으면서 그대로 있어야 하잖아. 원고에서 교정지로, 또 책이 되어야 하는 네가 이 계절에 더 단단해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야 가을에 너를 만날 사람들이 더 풍요로운 하루를 만들고, 춥더라도 포근한 겨울을 지나 의미 있는 봄을 맞을 거야. 그 봄이 이 봄과는 다른 봄이 되리라 기대하면서 교정지인 너를 대하려고. 애쓰고 있어, 너에게도 있을 아무도 모르는 마음으로.

6년 뒤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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