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중국으로 가는 옛길 ⑨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 조선의 북학파 지식인들은 유리창과 일대의 많은 후통(골목)에서 청 문인들과 필담 시문을 나누고 사유를 펼쳤습니다. 학술, 문화, 예술, 철학에 이르는 다방면의 담론들을 자유롭게 교환하고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전통시대 동아시아 국가 간의 인적 교류는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의 관료, 지식인들에게 사행(使行)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안목을 키우는 기회였고 세계를 보는 창(窓)이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조선 사신들이 중국의 문인들과 교류하였던 인문유대(人文紐帶)의 상징공간, ‘유리창(琉璃廠)’을 소개하겠습니다. 조선 선비, ‘자제군관’으로 해외 견문사람들은 정주지(定住地)를 벗어나 여행이나 관광을 통해 타문화를 경험하면서 성장하게 마련입니다. 관광(觀光)이란 용어는 “관국지광이용빈우왕”(觀國之光利用賓于王)이라는『주역』의 한 구절에서 유래한 것으로, ‘한 나라의 훌륭한 문물(文物)을 관찰하거나 본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조선 문인들은 평소 문헌으로 접했던 동경의 세계, 즉 대국의 풍정을 유람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사행단에 참여하는 것을 ‘일생의 기회’로 생각하였습니다.  17세기 중반~18세기 유럽에서는 그랜드 투어(Grand Tour/대여행)가 성행하게 됩니다. 영국, 독일 등 유럽 국가 귀족의 자제들이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으로 견문 목적의 여행을 떠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일종의 수학여행입니다. 유럽에 그랜드 투어가 있었다면, 그 무렵 조선은 어땠을까요? 바로 사행단의 ‘자제군관(子弟軍官) 제도’가 있었습니다.  사행단의 인적 구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 있는데요, 바로 자제군관입니다. 자벽군관(自벽軍官)이라고도 하죠. 이들은 사신단의 우두머리인 삼사(三使 : 정사, 부사, 서장관)의 자제(子弟)나 친지, 문사 중에서 견문을 목적으로 삼사를 수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들은 사행단의 공식 수행원(正官)이 아니었기에 사행단의 일정과 구속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롭게 명승을 유람하기도 했습니다. 자제군관 자격으로 사행에 참여했던 김창업, 홍대용, 박지원과 같은 이들은 연행에 참여하는 심경과 기대감을 “장유(壯遊: 장한 뜻을 품고 먼 곳을 여행하다)”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홍대용은 “하늘이 사람을 낼 때 각기 쓸 곳을 점지하는데, 자신 같은 선비에게는 중국 여행이나 시키는 모양이다”라고 하면서 연행에 참여하는 것이 이미 하늘의 뜻일 것이라는 생각을 펼쳐 보이면서 은근한 기대감을 내비쳤습니다. 박지원은 유리창 거리에서 ‘나를 알아줄 천하의 지기를 만나고 싶다’라고 했습니다.  연경 유람 1번지, 유리창조선 사행단이 경험한 연경(북경)의 명소는 명·청대 시기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18세기 연경유람 1번지는 단연코 정양문 밖의 유리창이었습니다. 유리창은 본래 원대(元代)부터 궁전과 사찰 건축물에 사용되는 유리기와를 굽는 곳이었습니다. 유리창은 융복사(隆福寺)와 더불어 장시(場市)가 발달하였는데, 청대 들어서 서적, 골동품, 문방사우, 서화를 파는 점포가 늘어나면서 문화 상업 지대가 되었습니다.  특히 강희제 때 시작된 대규모 국책 출판사업인『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편찬이 건륭제의『사고전서(四庫全書)』편찬으로 이어지면서 유리창은 학술·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서책이 몰리니 학자와 문인이 드나들게 마련입니다. 전국 각지에서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올라온 거인들이 과거를 준비하기 위해 머물기도 했던 곳이므로, 이곳을 찾는 조선의 사신들과 지식인들과의 조우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서로를 알아주는 관계, 유리창은 조선과 중국의 문인들이 가장 활발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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