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20세기가 21세기에게

서양고전문헌학은 긴 역사를 바탕으로 축적된 학술이다. 기원전 3세기에 태동했다. 긴 역사를 거치다보니 이 학문의 정체성이 변질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변질을 막아주는 ‘소금’ 역할을 하는 것이 있다. 서양고전문헌학의 정의가 그것이다. 『인문정신의 역사』(도서출판 길, 2011) 3페이지에는 “서양고전문헌학은 문헌 전승을 파악하고, 해명하며, 복원하는 학술이다”라고 말하고 있다.매체 변화가 있었지만, 학술 작업의 본질적인 성격이 바뀌지는 않았다. 기원전 3세기에도, 디지털시대에도 그 작업은 변함없이 수행되고 있다. 보기에 딱할 정도로 서양고전문헌학은 이른바 ‘소금’ 정의를 고집한다. 이렇다 보니, ‘호고주의’니 ‘실증주의’라는 비판과 비아냥도 듣는다. 대표적으로 니체(Fr. Nietzsche, 1844~1900)는 “예전에 문헌학이었던 것이 지금은 철학이 됐다”고 비판했다(『니체 전집』 II.1: 247-269).‘거기-그때’와 ‘여기-지금’의 대척점사실, 이 말은 서기 1세기의 철학자 세네카(Seneca, 서기 4~60)가 한 말이다. 말과 문헌에 갇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세네카와 니체의 주장이 서양고전문헌학의 근간을 흔들 정도는 아니다. 그들이 ‘이념’ 차원의 문제를 제기했지만, 서양고전문헌학은 구체적인 ‘실천(praxis)’을 중시하는 학술이기에 문헌의 전승 조건을 존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헌의 전승 조건의 존중’을 다른 말로 하면, ‘거기-그때(ibi et tunc)’로 말할 수 있다. 니체가 ‘여기-지금(hic et nunc)’의 깃발을 내걸었다면, 서양고전문헌학자들은 지금도 ‘거기-그때’의 기치를 고수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저 차이에 대해서 누가 옳고 그르냐를 따질 필요는 없다. ‘거기-그때’를 고집했던 사람들의 작업도 작게는 서양 학문의 역사에, 크게는 서양 문명의 발전과 변화의 원인을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그때’의 노선이 가장 선명했던 시기는 19세기다. 이때는 서양고전문헌학이 대학 안에 하나의 학과로 자리잡은 시기다. 임마뉴엘 칸트(1724~1804)가 철학과를 교양학부에서 독립시키려고 했던 노력을 들 수 있다. 그의 논고 「학부 논쟁」이 그 전거다.  칸트는 서양고전문헌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준다. 대표적으로 뵈크(August Boeckh, 1785~1867)를 들 수 있다. 하지만 뵈크는 문헌학에 대한 칸트의 입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헌학을 철학의 대척점에 위치시킨다. 지식은 보편의 지평에서 성립하지만, 그것은 역사의 맥락과 공동체의 맥락을 그 구성 조건으로 요구한다는 것이 뵈크의 입장이었다. 지식도 역사의 검증을 받을 때 지식으로서 의미 있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를 행하는 것이 문헌학이라는 것이다. 철학자들이 던지는 사변(speculation)의 공허함을 비판하는 것인데, 역사를 통해 검증받은 지식을 다루는 것이 문헌학이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입각해 뵈크는 서양고전문헌학을 ‘알려진 것을 알아가는 것’으로 정의하고, 이를 위해서 서양고전문헌학은 비판학문, 표준학문, 역사학문, 보편학문, 종합학문으로 나가야 한다고 제안한다. 철학자가 던지는 사변의 공허함 비판이 제안에 입각해서 서양고전문헌학은 서양 고대 문명 일반에 대한 학문을 발전시키는데,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서양 인문학을 주도한 ‘독일 문헌학’의 주역인 빌라모비츠(U. Willamoviz-Moellendorf, 1848~1931)는 이를 ‘고대학(Altertumswissenschaft)’으로 부른다. 그의 고대학이 내건 기치는 ‘여기-지금’이 아닌 ‘거기-그때’였다. ‘거기-그때’를 ‘그때-거기’의 맥락과 시각에서 바라보면서 ‘그때-거기’를 안전하고 온전하게 복원하자는 것이었다.  ‘고대학’이라는 이름이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다. 약간의 해명이 필요하다. 서양 원전을 탐구함에 있어서 고대학이라는 일반적인 지지대가 필요한 이유는, 원전을 복원하다 보면, 철자 하나 단어 하나를 고증하는 데에도 연관된 지식이 모두 동원돼야 풀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리스어와 라틴어 필사본을 다루기 위해서는 여러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특히 비판정본(critical edition)의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서지학, 목록학, 비문학, 문법, 운율론, 수사학, 시대별 문예 사조의 특징을 잡아낼 수 있는 능력, 사유 전개의 특성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 해당 문헌의 전문적인 지식에 대한 장악 능력, 고대 세계와 관련한 지식 일반이 요청된다. 이와 같은 현실적인 요청이 빌라모비츠가 고대학을 제안하게 된 이유였다.  따라서 고대학은 전승 문헌에 생기를 불어넣어 문헌 원래의 모습으로 살려내기 위해 제안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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