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중국으로 가는 옛길 ⑫ 마지막 회

연경(燕京·북경)이 아닌 열하(熱河)에서의 황제 만수절에 참가한 일은 장성 너머의 변방을 경험하지 못했던 조선인으로서는 매우 독특한 여행 경험이었습니다. 사신들의 연행견문 소회를 담은 기록들이 많이 전하지만, 유독 주목받는 연행록으로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꼽습니다. 연암은 며칠간의 열하 일정이었지만, 청의 황제가 변방의 요지인 열하에 틀고앉아 주변 민족들을 통할하는 정책들의 요체를 살피며 천하의 정세를 간파했습니다. ‘연행록’이라 하지 않고 ‘열하일기’라 칭한 끼닭도 그런 연유에서 나오지 않았을까요? 강희제의 열하 건설, 건륭제 때 완성승덕(承德)이라고 부르는 열하는 피서산장이 있어 우리에게 유명한 도시입니다. 강희제 재위 시 변방에 불과했던 막북지역 열하에 황제의 행궁을 짓고, 사냥과 피서를 명목 삼아 수개월 이상을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옹정제 때 체계를 갖췄고, 건륭제에 이르러 황가별장이자 이궁(離宮)으로서의 면모를 보이게 됩니다.  열하의 중심가에 세워진 강희대제의 동상이 위용을 자랑하듯 열하는 강희제와의 인연이 많습니다. 그래선지 최근 몇 년 사이 중국 문화콘텐츠 산업에서 가장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는 공연 장르인 ‘실경산수(實景山水) 공연’의 주제도 역시 ‘강희제’입니다. 정성왕조강희대전(鼎盛王朝康熙大典)이라는 이름의 대형실경산수 공연이 그것입니다.  공연은 ‘청 초기 이민족으로서 강희제는 역대의 중화문명과 학술을 계승하여 청 왕조의 기틀을 다지고 강옹건성세(康雍乾盛世)를 이룬다’는 내용입니다. 열하의 피서산장을 계획하고 주변 변방 국가들을 아우르는 큰 그림을 그려온 강희제의 일대기가 중심입니다. 특히 티벳의 성승을 열하로 모시는 장면이 장엄하게 펼쳐지기도 하는데요, 연암 일행이 황제의 명에 따라 수미복수묘(須彌福壽廟)에서 티벳 성승인 반선 6세를 만나는 장면과 겹쳐서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열하에 갈 기회가 있다면 이러한 공연을 통해 과거의 행적을 추체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연암 일행이 반선 6세를 만나는 장면은 조선 사신단의 열하 행적에서 많은 에피소드를 남기는 대목입니다. 혹여 열하일기를 탐독하는 독자께서는 주목해서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연암이 티벳 성승을 만나던 일이나 티벳불교, 즉 황교에 대한 담론은 찰십륜포(札什倫布), 황교문답(黃敎問答), 반선시말(班禪始末) 등에서 풀어내고 있습니다. 연암이 머물던 태학, 복원되다청 조정은 조선 사절단의 숙소를 태학(太學), 즉 문묘(文廟)로 배정합니다. 문묘는 조선 사행단이 도착하기 한해 전(1779년)에 완공된 공자의 사당이자 학부(學府)였습니다. 연암은 열하에서 약 6일간 머물게 됩니다. 관소인 문묘를 ‘베이스캠프’ 삼아, 피서산장에서 열리는 황제의 만수절 연회의 모습을 구경하기도 하고, 과일가게 인근의 객주에 들러 호기롭게 술을 마시기도 하는 등 연암의 기행은 다양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연암이 문묘의 숙소와 명륜당 일대에서 중국의 지식인 곡정 왕민호 등과 나눈 필담(筆談)이야말로 열하일기 저작의 중요한 바탕이 됐으니, 열하에서의 6일은 태학(문묘)에서의 행적이 가장 중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연암이 열하에서 경험한 필담과 유람, 사유에 대한 기록들은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행재잡록(行在雜錄), 경개록(傾蓋錄), 망양록(忘羊錄), 곡정필담(鵠汀筆談) 등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열하 문묘는 한때 예술중고등학교 교사로 사용되다가 2005년부터 작업에 착수해 2012년 새롭게 복원됐습니다.  연암이 왕민호, 기풍액 등과 함께 명륜당 창 너머의 달을 구경하며 지구 자전(自轉)을 얘기 했던 장소, 그리고 악기, 음악 등 다양한 주제로 쉼 없는 필담을 이어가느라 ‘양고기 식어 가는 줄도 모르던 현장’은 이제 전혀 다른 느낌의 건축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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