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이 넘어 상담공부를 시작했을 때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일로 만난 사람이든, 친구든, 가족이든 상담학개론 시간에 배운 것을 충실히 이행했다. 잘 들었고, 잘 들은 표시를 드러냈고, 그것을 확인시키려 상대의 말끝을 앵무새처럼 따라 했다. 때때로 상대방은 나를 칭찬했고, 나는 우쭐해서 어쩌면 신이 내린 상담자의 자질을 내가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고 속으로 흥분했다.
자기도취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누군가의 소개로 상담사를 만났는데, 내가 그에게 어떤 일을 함께 하자고 제안하는 자리였다. 나는 진지하게 물었고, 그의 물음에 답했고 나의 용건을 설명했다. 어느 시간 그가 식은 찻잔보다 더 차갑고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선생님, 그 상담 놀이하는 말투 좀 그만하실 수 없으세요?” 누군가 무심코 던지는 돌멩이 하나는 자라나는 싹을 밟아버리는 아픔이 있지만, 꿈속에서 헤매는 사람을 현실로 돌아오게도 한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금 어떤 마음이 일어나세요?”, “왜 그런 마음이 생겼을까요?”, “그랬구나, 마음이 아프셨겠구나”라는 말을 누군가 초면인 나에게 했다면 나 역시 그 자리에서 손과 발이 다 오그라들어, “그만 하세요 그런 코스프레!”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직업병이라는 관성의 힘
군대에서 첫 휴가를 나왔을 때, 어머니가 깨우면 벌떡 일어나 “이병 ○○○!”하고 관등성명을 복창했거나 여행사를 첫 직장으로 가졌을 때 집에서 전화를 받더라도 “감사합니다. ○○투어입니다”가 습관처럼 튀어나오던 버릇, 작가가 됐을 때 마감날이 돼야만 글이 써지는 습관 정도로 나에게서 사라졌다고 생각한 직업병이라는 것이 어떤 상황에서도 새로운 모습으로 짠하고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한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런 방식의 직업병은 상당히 긍정적이다. 자기 일에 대한 열정과 집중이 없다면, 파블로프의 댕댕이처럼 무조건 최근의 관심사를 반복하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인간의 뇌는 무언가에 꽂혔을 때, 그것만 생각하고, 그것과 관련된 것만 보이는 방식으로 세팅돼 있다. 이것은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의 운동 법칙 중 하나로도 해석할 수 있는데, 바로 관성의 법칙이다. 우리가 중학교 때 배운, 버스가 출발하면 몸이 앞으로 기울고, 멈추려 하면 뒤로 젖혀지는 그 현상 말이다. 직업병도 물리 법칙 같은 것이어서 그 직업에 충실할수록 그 자체가 관성이 되어서 그 방향으로만 심신이 반응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건망증병’부터 ‘시대역행병’까지
나라를 위해 이 한 몸 바치겠다는 소명으로, 앉으나 서나 나라 걱정, 지역구 생각에 여념이 없거나 혹은 그런 척만 하는 정치인들이라면 그 직업적 관성력이 보통 이상일 것이다. 어느 정치인 아내는 토크쇼에 출연해, 남편이 잠자면서도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악수하더라고 웃으며 말했다. 인사는 또 어찌나 잘하는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사 잘하는 직업 두 개를 뽑으라면 나는 신인 연예인과 정치인이라고 단번에 말할 정도로 정치인의 허리는 90도 굽힘에 최적화돼 있다. 카메라 애착증과 기록 집착력도 가히 최고라 할 수 있는데, 나흘을 굶어 다 죽어가는 단식 중인 정치인도 카메라가 등장하는 순간 눈빛이 형형해지면서 소생하는 신비를 보여주고는 한다. 더불어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사진을 찍을 것이라는 스피노자적 실천 윤리도 재난의 현장에서 아주 자주 목격되는 정치인의 직업병 중 하나일 것이다.
말했지만 이런 식의 직업병은 (간혹 주책으로 보이긴 하더라도) 열정이고 집중이며 애교이자 물리 법칙이다. 문제가 된다면 직업병과 비슷해 보이면서도 전혀 결이 다른 몹쓸 병인데, 이것이 자주 직업병과 혼동을 일으키며 발동됨으로써 한국말을 갓 배운 유치원 아이들조차도 정치인이라고 하면 이마를 찌푸리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 몹쓸 병을 대충 가락까지 붙여 나열한다면,
국민의 종이 되겠다고 입술이 부르트게 외치던 그 약속을 당선 순간 홀랑 까먹는 ‘건망증 병’
한 번 여당은 영원한 여당, 날 찍은 국민은 영원히 날 찍어줄 것이라는 ‘과대망상병’
의원님, 의원님 해대니 천상천하유아독존이 돼버리는 기고만장 ‘왕자병’
4년 후는 오지 않을 것이고 이 자리는 영원할 것이라는 ‘시간멈춤병’
남의 자식 흉은 보이고 내 자식 음주사고는 안 보이는 ‘눈먼 고슴도치병’
말 바꾸기와 거짓말은 정치인의 전통이라고 생각하는 ‘도덕 불감증병’
노무현 탄핵 후에 노란 다수당이 어떻게 한 번에 훅 갔는지를 자꾸 잊어버리는 ‘슈퍼여당병’
왜 자신들이 몰락했는지를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찌질이 야당병’
목소리만 크고 삿대질만 잘하면 유능한 것으로 생각하는 ‘시대역행병’
등 금배지에 광택이 사그라질 때쯤 감염 증세가 나타나는 직업병 유사 질병이 이렇게 많은 것이다. 
정치계에도 관통하는 F=ma
뉴턴은 두 번째 운동 법칙에서 힘과 가속도를 이야기했는데, 역시 우리가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머릿속에 집어넣은 F=ma(F: 힘, m: 질량, a: 가속도)가 그것이다. 어떤 질량에 가속도를 내게 하는 것이 힘이라는 것인데, 그런 건 몰라도 살아가는데 지장 없으니 통과하고, 정치인들이 밑줄을 그어야 할 것은 가속도와 힘이라는 두 단어다. 시대를 풍미한 한 소설가의 유명한 작품 제호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였는데, 이때의 추락은 등가속도 운동 혹은 자유낙하 운동이라 말할 수 있다. 옥상에서 폴짝 뛰어내릴 때, 초당 9.8m/s씩 속도를 올려주는 중력이라는 힘이 일정하게 작용한다. 덕분에 바닥에 떨어질 때는 높이 올라간 만큼에 비례한 큰 압력 에너지를 받게 되는데 날개조차 없는 정치인들은 그 충격을 고스란히 제 몸으로 받아내야 한다.
정치인들은 외줄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국민이 잠시 그 줄 위에 올려놓았고, 자기 소임을 다 하게 되면 그 줄에서 내려와야 하는 운명이다. 그걸 전문적으로는 공화국 국민이 한시적으로 자기의 권력을 위임했다고 하는 것이다. 외줄에서는 초심을 잃지 않고 균형과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경치에 빠져 잠시 한눈을 팔거나 아래에 서 있는 사람들의 추앙에 취해 헛짓거리하게 되면 발은 순간 허방을 향하고, 뉴턴의 추락은 시작된다. 그것을 방지하는 해결책도 뉴턴에게 힌트를 얻으면 된다. 정치인이 가지고 있는 힘(F)은 국민대중(mass)이 맡긴 것이므로 가속도(a)를 내면서 열심히 일만 하자는 것, 즉 F=ma임을 명심하고 기억하고 상기하는 것이다.
이쯤에서 마무리 하려니 무덤 속 뉴턴이 한 말씀하신다. “헤이 맨, 내 운동 법칙을 허락도 받지 않고 빌려 썼으니 끝까지 다 하셔야지.” 뉴턴의 제3법칙은 작용과 반작용이다. 되로 주면 되로 받고 말로 주면 말로 받고 욕하는 놈에게 침 뱉고 잘하는 놈에게 떡 준다는 것이다. 정치인은 하는 대로 표로 돌려받는다. 국민은 그만큼 냉철하고 현명하다.
특히 대한민국 국민은 가히 세계 으뜸이다.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타락한 권력을 끌어내린 국민이다. 우주의 질서와 법칙을 발견함으로써 인류에게 과학적 사고를 선물한 뉴턴의 위대한 업적은 2020년을 사는 대한민국 정치인에게 인문학적 방식으로도 적용이 충분하다. 특히 그의 운동방정식은 어떤 물체의 현재 상태를 알면 그 과거와 미래를 알 수 있다는 철학적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 다수당이라고 시건방 떨지 말고, 망한 당이라고 막장까지 가지 말고, 겸손하게 국민을 위해 일만 잘하라는 것이다. 복창하시라. 에프는 엠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