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직장인들이 가장 많이 앓고 있는 질병 중 하나는 목·어깨·허리 통증이다. 보통 ‘직업병’이라고 하는데 오랜 시간 PC 앞에 앉아 있는 일이 잦은 현대인의 고질병으로 꼽힌다. 일반적으로 ‘직업병’에 대해 얘기할 때, 어떤 특정 직업에 종사함으로써 근로 조건이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질환을 가리킨다. 통상 사업장에서 발생하는 산업재해를 떠올리게 되나 본 기사에서는 한 가지 일을 전문적으로 계속하면서 생긴 습관이나 버릇, 반복되는 생체징후 등으로 한정하기로 한다.
커버스토리 1면에서는 각자도생이 일상화된 시대에 직업병을 앓고 있는 직장인의 모습을 소개한다. 2면에서는 우리 사회에서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할 여러 직업군 가운데 ‘정치인’을 콕 집어, 전문가의 시선을 통해 이들의 직업병에 대해 진단했다. 3면에서는 방송대 구성원인 교직원과 학생들이 겪는 직업병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본다.

불확실성의 시대,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바야흐로 존버의 시대다. ‘존버’는 비속어인 ‘존××’와 ‘버틴다’가 합쳐진 의미로, 이외수 작가가 대중화한 신조어다. 어떻게든 버텨내려는 몸부림을 그대로 드러낼 때 사용한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불확실성이 고조되면서 지금의 상황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최선의 전략이라는 인식이다. 사실 존버라는 용어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직장인에게 적용되는 말이기도 하다.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경영환경이라서 악착같이 버텨야 하기 때문이다. 혼돈과 불확실성의 시대에 ‘존버’와 ‘직업병’은 어찌보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직장인이 존버하고 있는 모습은 직종별로 다양하게 그려진다. 여기에서 한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직업병’이 업무와 일상 생활에 시나브로 나타난다는 것. 특히 한 분야에 오래 근무하는 직장인이면 더 그렇다.
직업병 가지각색 … “나도 모르게 그만”
올해 한국고용정보원이 공개한 「한국직업사전 통합본 제5판」에는 총 1만 6,891개의 직업이 등재됐다. 인터넷을 비롯한 IT 산업의 발달에 따라 매년 신규 직업 숫자도 늘어나는 추세다. 그렇다면 직업병의 종류는 얼마나 될까? 거칠게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먼저 코로나19로 고생하고 있는 의료계 종사자의 직업병을 살펴보면 환자들의 아픔을 돌보느라 생기는 경우가 많다. 의료계 종사자는 바쁘게 돌아가는 일정으로 끼니를 챙기지 못하는 게 다반사다. 마음 놓고 식사를 하지 못하니 위장장애를 훈장처럼 달고 산다. 특히 3교대 근무자는 식사 시간과 생체 리듬이 일정하지 않아 위장병과 불면증을 가질 확률이 매우 높다.
기자들이 갖는 직업병의 강도도 만만찮다. 기사 마감에 대한 압박감은 물론 낙종에 대한 스트레스가 매우 강하다. 취재기자가 아닌 편집기자 중에도 이 같은 압박감을 경험한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중앙일보 디자인팀에서 근무하는 A차장은 “입사 초창기에 인쇄 넘기기 10분 전쯤 부장이 이미지 교체를 요구해 눈앞이 깜깜해진 적이 있었다. 허둥지둥하다 눈에 띄는 선배를 붙잡고 부탁했던 일이 생각난다”며 “조급한 마음에 화장실을 가는 것도 미루며 일에 집중할 때도 있어 배뇨기능이 원활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사진기자도 직업병에서 예외일 수 없다. 사진기자는 취재 현장에 도착하면 어떤 앵글로 현장을 담아야 할지 재빨리 파악해야 한다. 피사체를 빠른 시간 내에 구석구석 훑어야 카메라 앵글에 어떤 장면과 표정을 담을 것인지가 결정된다. 문제는 이렇게 스캔하듯 쓱 훑어보는 습관이 업무 현장이 아닌, 사적 모임에도 은연 중에 나온다는 점이다. 만약 상대방과 정면으로 눈이라도 마주치면 엉뚱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소가 된다.
통역사의 직업병은 소리와 관련이 있다. 통역사는 직업적 특성상 소리에 대한 민감도가 높다. 동시통역을 하는 경우 부스에 들어가 헤드셋을 끼고 온 신경을 곤두세워 통역을 하게 된다. 정확한 통역을 위해서는 아주 작은 소리에도 즉각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다 보니 통역 이후 일상 생활로 돌아와도 타인의 말(크기·속도)에 대한 민감도가 크다. 보안 전문가의 직업병도 확연히 구분된다. 이들은 신상러(최신 제품을 애용하고 고집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자 청소 강박증과 불안증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 정보를 안전하게 지켜야 한다는 신념에 소프트웨어 등 응용프로그램은 늘 최신 버전을 유지한다. 회의 내용이 담긴 화이트보드가 눈에 띄면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다른 팀원에게 노출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깨끗하게 지워 흔적을 없앤다.
이 밖에도 초등학교 교사는 지인들끼리 모임을 하다가 마칠 때 멘트 본능이 발동한다. 이른바 ‘종례병’이다. 여기에 더해 뭔가 ‘한 소리’를 더 하고 싶은 ‘잔소리병’도 추가 구성으로 따라 붙는다. 고성능 마우스를 사용하는 프로게이머는 뭔가 손에 잡히는 물건이 있으면 마우스처럼 움직이려고 한다. 보다 나은 손맛을 끊임없이 찾는 직업적 습관 탓이 크다.
이렇듯 직업별로 나타나는 직업병의 양상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이와 함께 우리나라에서는 직업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좀더 강고하게 작용하고 있어, 직업이 가진 고유의 이미지와 다른 요소가 결합돼 그 의미가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어차피 일할 거라면 즐겨야죠”
이와 같은 직업병은 몰입과 습관에 대한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겠으나, 생존방식에 대한 은유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미국의 저명한 작가이자 사회비평가인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질병을 ‘생물의학’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는 질병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려는 현대의 편향적 태도를 비판한다. 그러면서 이 책에서 왜 질병을 은유로 사용하는 태도를 지양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김현경 문화인류학자는 모 일간지 칼럼에서 “정신질환자는 망상이 심해져서 병이 난 게 아니라, 병 때문에 망상이 생긴 것이다. 우리는 진짜 망상과 은유로서의 망상을 구별해야 한다”며 “정신병은 그저 병일 뿐이다. 거기에 너무 많은 문화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질병으로서의 직업병을 명백히 치료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직장인으로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직업병은 자신의 일을 성실하게 해냈다는 일종의 자부심이자 부산물로서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생긴 버릇이나 특별한 습관이 몸에 배었고, 일정 수준을 넘어서 하나의 생활 패턴으로 이어진 게 ‘직업병’이다. 사실 ‘병(病)’이라는 이름을 지녔지만 딱히 몸에 해로운 것도 아닌 듯 싶다. 주위의 따가운 눈총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직업병이 없다고 하면 왠지 모르게 프로 직장인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직업병이 직장인에게 있어 나름 명예로운 훈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자신의 업무 분야에서 ‘경륜’이나 ‘내공’을 갖추는 단계까지 올라가지 않으면 직업병이 생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티핑 포인트』의 저자 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은 『아웃라이어』라는 책에서 ‘1만시간의 법칙’을 소개한 바 있다. 어느 분야에서든 남들보다 뛰어나려면 절대 연습량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직업병이 생길 정도로 자신의 업무 분야에서 반복된 훈련을 통해 몰입하는 경지까지 간다면 어느새 훌쩍 성장한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결국 직장 너머의 커리어 패스를 탄탄히 닦아놓아야 이후 자신의 업무를 넘어 일상 생활에서도 의미와 재미를 느끼는 단계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얘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