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사회에서 한 세대와 다른 세대들 간의 불평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 때문에 젊은 세대 내부와 미래의 불평등 또한 커질 것이다.”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불평등의 세대』(문학과지성사, 2019)에서 ‘세대론’이란 프리즘을 차용해 한국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분석했다. 이 교수가 주목하는 건 386세대다. 한국전쟁 및 산업화 세대와 386세대가 충돌을 거듭하며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인 결과, 현재 한국 사회의 중심 권력은 386세대가 잡았다.
경험과 노하우 독점한 세대의 탄생
이들이 국가, 기업, 시민사회를 가로질러 건설한 인적 네트워크는 한국 현대사에서 유례없이 견고하다. 1980년대에 전국적인 조직망을 형성하고 시민단체 네트워크로 ‘정치적 민주주의’를 이뤄냈을 뿐만 아니라, 1990년대 세계화 물결 속에서 해외 지사와 공장을 일구며 스스로를 불모지의 ‘리더’로 세우는 경험을 했다.
이 교수는 1997년 한국을 덮친 금융위기도 386세대에는 호재로 작용했다고 봤다. 기업은 금융 위기를 구조조정의 기회로 삼았고, 아무런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산업화 세대를 노동시장에서 퇴출시켰다. 이후 기업은 짧게는 3~4년, 길게는 10년에 가깝게 ‘정규직’ 사원을 채용하지 않았다. 채용하더라도 386세대와 비교해 훨씬 작은 규모다. 금융위기는 386세대를 기업 조직에 사실상 홀로 남겨진 ‘거대한 세대 네트워크 블록’으로 만들었다. 같은 시기 시민사회와 정치권에서의 386세대는 유교적 관료제와 결합한 권위주의에 ‘반체제 운동’으로 저항하며 산업화 세대의 대항 권력을 구축했다. 시장과 정치권, 시민단체에서 경험과 노하우를 독점한 세대가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이 교수는 이제는 586세대에 접어든 이들이 한국 사회 구조의 정점에 오르고 민주주의가 공고화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불평등은 줄어들지 않고 되려 심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왜 우리 사회는 386세대와 함께 민주화 여정을 거쳤음에도, 우리의 아이들과 청년들은 더 끔찍한 입시 지옥과 취업 전쟁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치고 있는가? 왜 민주주의는 공고화됐는데, 우리 사회의 위계구조는 더 잔인한 계층화와 착취의 기제들을 발달시켜 왔는가? 왜 여성들은 여전히 입직과 승진, 임금에서 차별받는가?”
386세대가 방관했던 불평등한 부의 재분배에
실패한다면, 현재의 청년 세대는 영원히
‘공정한 게임’을 희구만 하는 세대로 남을 것이다.
이 교수는 세대론에 ‘한국형 위계 구조’라는 틀을 더해 한국 사회가 계층화된 과정과 이로 인한 부의 불평등한 분배를 분석한다. 그는 ‘우리도 다 겪었으니 인내하라’, ‘세대갈등은 위험하다’라는 윗세대의 충고를 착실하게 따르면, 언젠가는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유교 사회의 위계 구조를 386세대가 ‘이익 네트워크’로 전환했고 본다. 그의 세대론이 문화 혹은 담론으로 세대론을 소비하던 여타의 시도와는 다른 점이다.
이 교수는 노동 현장에서의 세대 독점에도 주목했다. IMF 금융위기에서 살아남은 386세대(의 노조)가 사회 연대와 절연하는 대신, 대기업들로부터 자신의 몫을 챙기는 데 몰입했다는 비판이다. 기업이 생산시설을 해외로 이전하고, 비정규직을 확대하는 동안 정규직 노동자가 하청업체를 착취하는 구조가 고착화된 것이다. 2000년대부터 새롭게 유연화된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세대에게는 ‘차별적 질서’가 적용된다. 이를테면, △비정규직 중 태도와 능력이 탁월한 자만 정규직으로 전환 △386세대 정년은 50대 중반에서 60세로 연장 △386세대 기득권뿐만 아니라 자녀의 기득권도 인정 △성과 기반 보상체계 만들고 수량화 △성과 기준은 386세대가 만들되, 내부적 합의 안 되면, 국제 가이드라인 따름 △성과 체계 기준은 386세대 이후 세대부터 적용 등이다. 노동시장에서 급속하게 진행된 이 같은 ‘신분적 위계화’는 부의 불평등한 분배를 초래했다.
386세대의 이익 네트워크를 정치권·시민사회로 확장하면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이 교수는 386세대인 정규직 노동조합원인 A씨가 노동조합 선거를 거쳐 위원장이 되고, 동년배 국회의원, 교수, 시민단체 대표, 정부 고위직 관료와 젊은 시절부터 ‘잘 아는’ 30년 지기라고 가정한다. 이들은 정부와 기업, 정당, 시민단체의 리더로서 정책과 자원을 동원하고 조직화해 제도화시킬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 교수는 이렇게 세대의 정치가 한국형 위계 구조에 장착될 때 ‘네트워크 위계’가 탄생하고, 권력의 중심을 차지한 386세대가 그 부를 분배하지 않고 오히려 자녀에게 대물림하면서 불평등이 격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금융 위기 이후 만들어진 ‘차별적 질서’
개천에서 용이 나던 시대는 지났지만, 여전히 교육은 전 국민의 관심사다. 교육 자본의 대물림을 위한 전 국민적 욕망은 부동산 불패 신화의 대치동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2007년 한국을 방문해 “아침 일찍 시작해 밤늦게 끝나는 지금 한국의 교육제도는 산업화 시대의 인력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다시는 써먹지 못할 지식을 암기하고 시험을 보는 데 하루 열다섯 시간씩 16년을 낭비하고 있다고 본 것. 하지만 이 교수가 보기에 386세대는 “16년은 세월의 낭비가 아니라 이후 40년의 신분과 수입을 보장하기 위해 한 가족과 가문 전체가 건 젊은 세대의 ‘판돈’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세대”다. 문해력이 뛰어난 일부 386세대는 수천 개에 달하는 대학별 입시전략을 파악하는 데도 타 세대를 압도한다.
이 교수는 한국형 위계 구조를 벼농사 체제 위에서 산업화 세대가 첫 삽을 뜨고, 이념·자원 동원 네트워크와 노동 유연화 위계를 장착시킨 386세대가 완성했다고 분석했다. 문제는 386세대의 약속 위반이다. 386세대는 산업화 세대의 ‘농촌형 위계’를 타파하면서, 청년 세대에 자신들은 겪어보지도 않았던 노동 유연화 기제를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네트워크의 희생자는 다름 아닌 청년과 여성.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악화일로에 있는 청년 노동시장 상황에서, 이 교수는 “2010년대 후반 급진화된 페미니즘이 부상한 것은 우연이 아니며, 이를 ‘미러링’하는 젊은 남성 보수의 부상도 우연이 아니다”고 진단한다. 현재의 청년 세대는 금수저와 흙수저의 대비를 일찍부터 ‘내면화’한 세대다. 상층에 진입할 수 있는 문은 좁아지고 경쟁자는 많아졌는데, 불공정한 게임의 수혜자들은 점점 많아진다. 상층 노동시장에 진입한다고 해도, 서울에서 집 한 채 장만하기가 요원하다. 이 교수는 386세대가 방관했던 불평등한 부의 재분배에 실패한다면, 현재의 청년 세대는 영원히 ‘공정한 게임’을 희구만 하는 세대로 남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