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세대갈등이라는 유령

수메르인의 점토판에서 조선 시대 낙서에 이르기까지 빠지지 않는 문구가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다’는 것. 세대갈등이란 어쩌면 인류 역사가 시작하면서부터 존재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꼭 세대갈등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은 아니다. 갈등의 순기능에 주목한 독일 출신 루이스 코저 미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 사회학과 교수의 지적처럼, 갈등은 사회 문제를 파악하고, 나아가 사회변화를 앞당기는 데 기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세대는 사회의 방향을 조정하기까지 한다. 이들이 출현으로 역사가 바뀌었다. 어떤 세대들이 세상을 바꿨을까?

 

한국 학생운동의 시초, 4·19세대
1960년 4·19혁명을 주도한 세대다. 당시 20대 초반에 속하던 대학생 세대지만, 고등학생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대통령 불출마를 선언한 이승만 대통령이 대선에 입후보하며 4선을 꾀했고, 자유당은 선거자금을 모금해 부정선거를 공모했다. 유력한 야당 후보였던 조병옥이 급서하면서, 95~99%의 득표로 이승만은 대통령으로, 이기붕은 부통령으로 당선됐다. 부정선거규탄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됐고,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4·19세대는 3·15부정선거와 4·19혁명, 1961년의 5·16군사정변 등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면서 하나의 세대를 형성했다. 이후 이들은 1964년 6월 3일 한일회담에 반대했던 6·3세대와 함께 한국 학생운동 1세대로 자리매김했다. 4·19혁명을 주도한 당시 학생 지도부가 차별점을 갖는 지점은, 이후 이들이 정치·경제·사회·문화·학계·언론계 등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점이다. 프랑스에 68세대가 있었듯, 한국사회에도 68세대로 지칭할 수 있는 세대적 흐름이 존재한다. 넓게 말한다면 4·19세대에 포함할 수 있는 이들인데, 소설가 김승옥, 이청준, 시인 황동규, 문학평론가 김병익, 김주현, 김치수, 김현 등으로 대표되는 세대들이다.

 

특히 이들은 1969년 1월에 <68문학> 제1집을 발간한 뒤, 발전적으로 해체해 작가의 개성과 문학성을 옹호하려는 측은 <문학과 지성>에 흡수되고, 작가의 대사회적 발언을 중시하는 측은 <창작과 비평>에 참여함으로써, 한국지성사의 두 축을 감당하면서 새로운 세대를 육성하는 데 앞장섰다.

 

68세대 “모든 권력을 상상력에게”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청년들이 기성세대가 된 1960년대 후반, 전쟁 영웅 샤를 드골이 사회 혼란 일소를 명분으로 10년간 대통령으로 집권하면서 부패와 혼란은 극에 달했다. 여전히 존재하던 귀족들은 대학 위의 대학으로 불리는 ‘그랑제콜(Grands oles)’ 중심으로 자녀에게 기득권의 삶을 세습하고 있었다. 대학 서열화의 병폐가 극단화돼 있던 시기다.

 

이 시기 68세대가 등장한다. 미국과 영국, 독일에서도 68세대가 등장했지만, 프랑스의 68세대는 사실상 다른 나라의 68세대를 견인한 선봉대 역할을 했다. 다른 나라와 달리 대학생뿐만 아니라 중고등학생과 노동자들이 연대했다는 점에서도 주목받는다.

 

프랑스에서 68운동이 시작된 것은 미국의 베트남 공습에 항의하기 위해 농성하던 6명의 학생이 성조기를 불태운 죄로 구속된 직후인 1968년 3월 22일이다. 파리 낭테르대 학생들이 모여 총장실을 점거했고, 이 농성과 시위가 다른 대학으로 퍼져 나갔다. 600명이 넘는 대학생이 체포되며 소르본대는 폐쇄됐다. 기성세대는 풍요로운 시대에 거리에 나와 시위를 하는 68세대를 이해할 수 없어 했지만, 무장 경찰이 학생을 구타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언론에 보도되면서, 학생연합과 교원노조는 무기한 휴업에 들어갔고, 68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돼 900만명이 파업에 동참했다.

 

1969년 4월 드골은 대통령을 사임함으로써 68운동도 일단락됐다. 68운동의 성과로는 사회적으로 파리 13개 대학이 국립대가 되면서 학벌 사회를 구조화하는 대학 시스템이 전면 개편됐다. 68세대는 무료에 가까운 등록금을 납부하는 첫 수혜자가 됐다. 섹스, 마약, 동성애 등 모든 사적 금기가 풀렸기에, 68운동은 개인과 사회를 동시에 해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민주화’ 외친 텐안먼(天安文) 세대
10여년간 지속된 문화대혁명으로 초토화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덩샤오핑이 이끄는 중국 정부는 ‘개혁’과 ‘개방’을 외쳤다. 일자리가 늘었고 먹을 것이 풍족해지면서 경제가 살아났다. 하지만 빈부격차는 날로 심해졌다. 공산당 고위 간부의 특권 행사와 만연한 부정부패 때문이었다. 비판의 목소리를 수용하지 않는 중국 정부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1989년 5월, 베이징대를 중심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됐다. 제2차 텐안먼 사태다(1차는 1976년 4월,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기 위해 텐안먼 광장에 모인 시민들을 탄압한 사태). 수천 명의 학생이 텐안먼 광장에 집결해 대자보를 붙이고 ’권위주의 타파’, ‘경제 개혁’, ‘정치 민주화’, ‘언론자유’ 등의 구호를 외쳤다. 수백만 명의 시민이 합세했고, 베이징 시내가 마비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중국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6월 4일 새벽, 텐안먼 광장에 진입한 전차와 장갑차를 동원한 군대는 대학살을 행했다. 이 장면이 당시 중국을 방문 중이던 고르바초프 구 소련 대통령을 취재하던 국제 기자단에 포착되면서 전 세계에 중계됐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1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집결했으며, 사망자는 241명, 부상자는 7,000여 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중국 정부에서 발표한 공식수치일 뿐 실제 사망자는 수천 명이 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민주화를 외친 제2차 텐안먼 세대의 정신은 최근 우산혁명을 외치는 홍콩의 젊은 세대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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