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한국전쟁 70주년 기획 ‘다시 평화의 눈으로 DMZ를!’

철원은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한 격전지 중 하나였다. 주인이 24차례나 바뀌는 격전을 치른 백마고지는 포연이 자옥하게 산을 뒤덮어 마치 백마가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형상처럼 보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쟁으로 인해 인구 2만 명이 넘었던 도시 철원은 완전히 파괴됐고, 전쟁 이후에도 가장 치열한 남북대결의 현장이 되고 말았다. 직접적인 전투를 동반하는 열전(熱戰)과는 다르지만, 휴전 이후 지속된 냉전(冷戰) 또한 삶의 일상 속에서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대결과 적대를 생산했다.철원의 마을들은 전쟁 이후 월하리를 시작으로 서서히 복원되기 시작했지만, 냉전의 산물로 기획된 감을 지울 수 없다. 해방 전 월하리는 철원에서 가장 번성한 곳이었다. 행정기관과 각종 시설이 들어섰고, 근대화의 물길이 시작되던 기점이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분단과 함께 월하리는 북쪽 관할지역로 재편됐고 전쟁으로 인해 완전히 파괴됐다. 1954년 4월, 당시에는 민통선 북방지역에 속하던 월하리에 72세대가 이주해 왔다. 그들은 월하리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었다. 도피안사 건너편 산기슭에 자리잡은 아담한 마을인 월하리는 말 그대로 ‘달이 머무는 마을’이다. 현재 월하리는 ‘달이 머무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살려 미술작가들과 주민들이 자연과 사람의 삶을 담은 벽화를 꾸미고 달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세움으로써 상생의 장으로 거듭나고 있다.국방과 식량증산 목적의 재건촌북과 마주한 최전방이며 최초의 재건촌인 철원읍 대마리는 남북의 가장 강력한 화기(火器)들이 집중돼 있는 냉전의 공간이다. 일반 시민들이 살기에는 부적합했지만 당시 정부는 북의 침략에 대응하면서도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전투력을 갖춘 사람들’을 선발해 이주를 도왔다. 1967년 4월 5일, 150가구가 열 명씩 열다섯 개 조로 나누어 대마리에 입주했다. 한 손에 총을, 다른 손에 농기구를 들었던 이스라엘의 키부츠 사람들처럼 그들은 북과의 대치상황 속에서 식량 생산의 일꾼이자 분단국가를 지키는 선두주자, 즉 전위(前衛)로 투입됐다. 그들은 땅을 준다는 나라의 약속 하나만 믿고 이주해 왔지만 눈앞에 펼쳐진 땅은 잡초와 나무가 무성하고, 바위와 돌들이 너부러진, 게다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수많은 지뢰가 곳곳에 박혀 있는 전쟁의 땅이었다. 지뢰 탐지와 개간 작업을 하던 중 지뢰가 터져 다리가 절단되고 사망하는 사고도 있었지만 마을 개척 작업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마을 주민의 희생과 노력 끝에 황무지에 불과했던 대마리는 맛 좋기로 이름난 오대쌀 생산지로 변했다. 평화의 씨앗을 뿌리며 전쟁의 아픔을 극복해 왔던 대마리는 오늘날 두루미평화마을로 불리기도 한다. 1999년에 민통선 마을에서 해제돼 지금은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곳이 됐다. 철원의 개척마을들은 냉전과 분단의 산물이면서도 오히려 군사적 공간을 북쪽으로 밀쳐 올리며, 그곳을 점차 평화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의 새로운 교차로로 평가된다.철원읍 동쪽에 위치한 동송읍의 양지리와 이길리 역시 대북 선전용 마을로, 1973년부터 조성한 재건촌이다. 마을 사람들의 삶은 콘크리트 날림공사로 지은 9평 규모의 집들로 이주하면서 시작됐다. 마을의 주택은 대북 선전용답게 모든 창과 문을 북쪽으로 내었으며, 마을 전체가 하나의 무대처럼 조성돼 있다.전통적인 마을들이 배산임수 형식을 취하고 있다면, 이들 마을들은 애초부터 풍수지리와는 전혀 무관하게 구성됐다. 평지 한복판에 바둑판처럼 주택들을 배치했고, 주택들 사이의 골목길도 잘 포장해서 조금의 무질서도 허용하지 않는 듯한 모습이다. 대북 선전용이라는 목적에 충실한 것이다. 주민들은 ‘진짜 삶’을 원했다 그러나 정부의 의도와 달리 이곳에 이주한 사람들은 ‘대북 선전용’ 목적에 맞춘 주택 형태에 균열을 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에 맞춰 집을 증축하고 변형하면서 독특한 형태의 주택들로 변모시켰다. 군사적 대결과 긴장보다는 삶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삶은 냉전이라는 시대의 불화를 넘어 모든 것을 녹여내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1993년 1차 조종 이후, 세 차례의 조정을 거쳐 현재 민통선은 ‘군사분계선 10㎞ 이내’로 축소됐고, 그만큼 냉전의 공간은 줄어들었다. 양지리는 2012년부터 민간인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곳이 됐다. 하지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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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app***
    빨리 통일이 되어 마음대로 왕래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빌어봅니다.
    2020-10-07 11:36:09

사람과 삶

영상으로 보는 KN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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