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김옥렬의 미술로 읽는 세계사

‘거꾸로’의 정신이자 ‘반(反)예술’로 기성의 가치에 도전해온 이승택의 실험적 예술세계, 모두가 앞만 보고 달려가는 세상에서 거꾸로 보며다른 세상을 만들며 살아 온 노장의 작가정신은 그 누구보다 앞선 미래에 가닿고 있다. 이승택(1932~ )은 한국 실험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1950년대 이후 현재까지 설치, 조각, 회화, 사진, 대지미술, 행위미술을 넘나들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의 현실과 한국인 특유의 체험을 자신의 실험미술에 투영한 이승택은 이후 조각의 영역을 비물질적인 상태까지 밀고 나가는 동시에, 한국인으로서 표현할 수 있는 정체성을 늘 자신의 작업 속에서 보여주었다. 미술사학자인 김미경은 일찍이 『한국의 실험미술』(시공사, 2003)에서 이승택의 실험미술의 의미를 “한국적인 것과 서구적인 새로움 사이의 딜레마를 전통적 한국미술의 미에서 해결하고자 했다”고 정리한 바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1969년에 쓴 「한국 현대 조각의 전망」에서 그는 조각을 어떤 물질성을 벗어나 공중에 걸리거나 냄새를 풍기는 영역으로 확산시키려는 자신의 의도를 국외미술의 예에서 찾고, 독일작가로 1965년 미국에 정착 후 물의 순환과 기상현상, 중력 등 물리학적인 현상과 생물학적 현상에 관심을 가졌던 하케(Hans Hacke)의 초기작품인 ‘물과 바람의 조각’에 관심을 보였다. 1964~1965년 경부터 들에 불을 피우는 작업을 통해 불이 타는 현상적 측면과 연기라는 제3의 현상을 실험한 이승택은 비물질적인 것으로 확산되는 서구 조각의 현상에서 자신의 작업이 나아갈 방향과 근거를 찾으면서도 한국적인 것과 서구적인 새로움 사이의 딜레마를 전통적 한국미술의 미에서 해결하고자 했다.”실험미술(實驗美術)의 사전적 의미는 ‘20세기 미술에서, 예술가들이 무엇인가 가치 있는 결과를 기대하면서 새로운 방법이나 형식을 사용하여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술전문지 <월간미술>은 “20세기 미술에 있어서 ‘새로운’, ‘대담한’, ‘이상스러운’, ‘자극적인’이라는 의미를 갖는 ‘실험적인’이라는 말은 ‘아방가르드’라는 말과 사실상 동의어로 취급된다. 그것은 미술비평에서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라고 설명한다.     세계미술의 흐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반(反)예술적인 태도를 통해 통렬한 시대비판을 감행하면서, 단순히 개인의 미의식을 그려내는 데 멈추지 않고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반응하면서 실험미술로 격동기의 사회상을 담아내는 데로 나아갔다. 전후 한국미술 역시 반추상과 앵포르멜 회화(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서정적 추상 회화의 한 경향. 정형화하고 아카데미즘화한 기하학적 추상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난 것으로, 격정적이며 주관적인 것이 특징) 이후 실험미술을 통해 시대를 감각하는 작가들에 의해 발전해왔다.   1960~70년대 삼엄한 통제의 시대와 마주한 미술가들의 반(反)예술적 태도는 캔버스를 불태우거나, 일상의 사물(object)을 통해 당시 시대적 상황을 진단하는 비판적 작업방식으로 이어졌다. 기존의 회화를 벗어난 새로운 시도는 회화의 해체 및 확장을 거쳐 완성된 ‘작품’보다는 제작 ‘과정’을 통해 시대정신을 담는 행위미술, 설치미술, 과정미술로 구체화됨으로써 시대와 호흡하는 실험미술을 빚어냈다.   1960~70년대 정치적 격동과 미술의 대응1960~70년대는 세계사적으로도 사회변혁을 위한 대혼돈의 시기였다. 해외에서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흑인 인권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암살, 프랑스 68혁명, 베트남 전쟁 등 이념 갈등과 인권운동이 이어졌다. 한국 현대사 역시 격동의 시기였다. 4·19혁명, 5·16 군사쿠데타 그리고 새마을 운동과 유신체제 등을 지나온 혼란과 변혁의 시기였다. 특히 한국은 1960~1970년대 제3공화국에서 4공화국으로 이어지는 정치·사회·경제적 격동기를 맞는데, 한국의 실험미술운동은 바로 이러한 격동의 시간대와 궤를 같이 한다. 일반적으로 한국 실험미술의 태동은 1967년 겨울에 열린 ‘청년작가연립전’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청년작가연립전은 앵포르멜 시기 이후 설치 및 오브제를 포함한 해프닝을 보여준 국내 최초의 집단적 시도로 평가받고 있다. 1967년 미술대학 동문으로 구성된 ‘무(無)동인’전은 “우리의 작업은 실험, 무에서 출발, 창조만을 위한 행동이다”라는 선언문을 시작으로 실험미술을 전개했다. 이들은 이보다 앞선 1962년 국립도서관 화랑에서 제1회전을 열었는데, 캔버스에 조개껍데기를 붙이거나 구멍을 뚫기도 하고 유화물감 위에 비닐을 붙여 우글쭈글한 마티에르를 시도했다. 이후 1967년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열린 ‘현대미술실험전’이라는 타이틀을 내건 제2회 전시에서 회원들은 버려진 폐물, 수술용 응급의료기구 깨진 그릇, 고무주머니, 고무장갑, 해골 마스크, 헌 구두, 방독면, 우주복 등을 등장시킴으로써 본격적으로 실험적 행보를 취했다(『한국의 실험미술』 참조).당시 실험미술을 시도했던 한국 작가들은 권위에 대한 저항의식을 반영한 예술적 태도를 드러냈는데, 이러한 태도에서 기인한 예술가의 작품은 반(反)예술적일 수밖에 없다. 예술가는 ‘예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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