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박은수
아마르티아 센(1933~)의 『정의의 아이디어(The Idea of Justice)』(하버드대출판부·펭귄북스, 2009)가 한국 독서시장에 호출되는 데 꼬박 10년이 걸렸다. 이 10년은 단순한 시간적 거리가 아니다. 그것은 그의 이론과 사상을 소화할 수 있는 인식적 거리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
물론, 그의 호출이 지연된 데는 같은 해 출간된 하버드대 동료 교수이자 정치철학자인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도 한몫 거들었다. 미국에서는 10만부 남짓 팔리는 정도였는데, 한국에서는 크게 인기를 끌어 2012년 6월까지 130만부 이상 팔리는 ‘열풍’ 현상을 낳은 책이다. 이를 두고 당시 <월스트리지널>은 “미국의 교수가 한국에서 히트 치고 있다” (원제 「U.S. Professor Is Hit in Seoul」, By Evan Ramstad, 2012. 6. 5)라는 진단 기사를 통해 “한국 국민의 공정성에 대한 욕구가 더 크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동서(東西) 사상의 용광로에서
그러나 샌델 열풍이 『정의의 아이디어』 번역을 가로막았다고 보는 건 중요한 측면을 간과한 것이다. 번역자인 이규원 박사가 고백한 것처럼 “옮긴이의 손에 오기까지도 적지 않은 난항을 겪은 것으로 알고 있다. 철학, 법, 정치, 경제를 포괄하는 사상적 기반이 만만치 않았고 센의 유려하고 섬세한 문체적 특징은 오히려 번역 과정에서 난관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에 등장하는 주인공 핍은 “아이들이 존재하는 작은 세계에서 부정의(injustice)만큼 잘 이해되고 잘 느껴지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의 번역이 늦어진 데는 서양문화와 인도문화의 혼합 용광로를 거쳐 형성된 센 특유의 사유적 특성이 작용한다.
센의 책이 출간된 직후 학계에서 제기된 흥미로운 반응을 하나 들어보자. 크리스 브라운 런던정경대 교수는 <윤리와 국제 문제>(2010년 가을호)에 발표한 「아마르티아 센과 ‘정의의 아이디어’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센은 계몽주의 가치들을 강력히 지지하지만, 이들 가치들이 본질적으로 서구적 방식들에 연계된 것이라는 생각에는 강력하게 저항했다. 이성, 정의, 그리고 자유는 비서구세계가 인지하고 충실히 지켜야 할 유일무이한 서구의 아이디어들이 아니다. 센에게 그것은, 인류의 보편 유산의 일부다.” 센이 이성, 정의, 자유의 개념을 서구 제국주의 산물로 폄하하는 탈식민이론이나 서구 승리주의를 부정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이해 위에서 센은 책의 앞머리에 저 유명한 고대 인도의 법학에 등장하는 두 개념, 바로 ‘니티(niti)’와 ‘니야야(nyaya)’간의 중요한 구별을 가져왔다. “니티라는 개념은 조직의 적절성 및 행위의 정당성과 관계되어 있는 반면 니야야는 벌어지는 일과 그 방식, 특히 사람들이 실제로 영위할 수 있는 삶과 관계가 있다. (……) 정의의 아이디어가 도모해야 하는 공정성(justness)에는 서로 무관계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다른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센은 니야야와 니티의 구별은 한 국가 내에서뿐만 아니라 국경 너머까지 의의를 가진다고 설명한다. 어째서 정의의 문제가 국경을 넘어 ‘국제적 차원’에서 다뤄져야 하는지를 암시하는 대목이다.
교양강의에 기댄 샌델의 책과 달리 센의 『정의의 아이디어』는 완전한 학술적 구성과 체계를 잡고 있다. 또한 스스로 밝혔듯 이 책은 ‘존 롤스’라는 정의론의 앞선 선배 거인에게 헌정한 지적 작업이며 동시에 ‘롤스와 그 학파와의 암묵적 대화’이기도 하다. 아카데미즘의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사정은 저명한 법학자이자 정치사상가인 로널드 드워킨 전 옥스퍼드대 교수의 필생의 역작 『정의론(Justice for Hedgehogs)』(하버드대출판부, 2011)이 2015년에 국내에 번역, 소개됐다는 점에서 정당한 지연 사유가 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정의의 아이디어』가 소개되는 데 10년 걸린 것일 뿐, 센의 여타 책들은 진작부터 소개돼 왔다. 『불평등의 재검토』(1999, 2008), 『자유로서의 발전』(2001, 2013), 『윤리학과 경제학』(2006, 2009),『센코노믹스, 인간의 행복에 말을 거는 경제학』(2008), 『정체성과 폭력』(2009), 『GDP는 틀렸다』(조지프 스티글리츠, 장 폴 피투시와 공저, 2011), 『세상은 여전히 불평등하다』(2018) 등이 국내에서 만날 수 있는 그의 책 리스트다.
10년 만에 제대로 만나게 된 이유
그렇다면 센의 『정의의 아이디어』가 10년 만에 한국의 독자들 앞에 나타난 혹은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무엇일까? 센의 책은 홉스, 로크, 루소, 칸트로부터 롤스, 노직, 고티에, 드워킨에 이르기까지 사회계약론적 전통을 계승하는 주류 정치철학의 비판에서부터 출발한다. 센이 자신의 고향에서 가져온 ‘나야야(nyaya)’를 상기해보자. 이것은 훨씬 넓고 포괄적이다. 크리스 브라운 런던정경대 교수가 읽어낸 것처럼 “이것은 제도 자체에 직접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우리가 만드는 제도로부터 출현하는 세계를 바라”보는 개념인데, ‘나야야’를 원용한 센은 유럽 사상의 계보에 이를 적용했다.
즉 홉스, 로크, 루소, 칸트와 같은 이론가와 가장 최근의 롤스 등이 ‘정확한 제도’의 수립을 모색했다면, 애담 스미스, 콩도세르, 울스턴크래프트, 벤담, 마르크스, 밀 등 사회선택이론의 계보에 있는 사상가들은 좀더 비교 접근법을 취해 사회적 실현을 전체론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사회적 실현이 비단 제도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인간 행동을 비롯한 다른 요인들의 산물이기도 함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센은 완벽히 정의로운 사회를 정의하거나 이를 가능하게 하는 ‘완벽한 제도’를 제시하려 애쓰기보다 눈앞에 보이는 명백한 부정의(injustice)를 제거함으로써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정의를 촉진할 수 있는지, 정의에 대한 상대적 관점과 대립되는 문제들은 어떻게 다뤄야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역설하게 된다.
어쩌면 아마르티아 센의 이러한 접근은 그간 서구사상을 지배해왔던 백색의 형이상학으로부터 그 스스로가 자유로웠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철학, 법, 정치, 경제, 보건 등 학문 전반을 아우르며 빈곤, 기아, 젠더, 소수자, 불평등, 복지 등 반세기에 걸쳐 아마르티아 센이 천착해온 인류의 문제는 지금 바로 이곳, 한국 사회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뿌리 깊은 차별과 혐오, 소수자에 대한 증오는 ‘서로 다른 인식의 공존’을 불가능하게 한다. 롤스의 이상적 정의의 추구보다 부정의를 제거하는 실천적 노력을 강조하는 센의 제안은, 롤스, 샌델, 드워킨을 지나 이제 막 한국 사회에 도착했다.
‘부정의(不正義)’ 해결에 역점
칸트보다 애덤 스미스의 계보
주류 정의론 풍부하게 ‘보완’
빈곤·기아 등 국제적 대처 강조
물론, 그의 호출이 지연된 데는 같은 해 출간된 하버드대 동료 교수이자 정치철학자인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도 한몫 거들었다. 미국에서는 10만부 남짓 팔리는 정도였는데, 한국에서는 크게 인기를 끌어 2012년 6월까지 130만부 이상 팔리는 ‘열풍’ 현상을 낳은 책이다. 이를 두고 당시 <월스트리지널>은 “미국의 교수가 한국에서 히트 치고 있다” (원제 「U.S. Professor Is Hit in Seoul」, By Evan Ramstad, 2012. 6. 5)라는 진단 기사를 통해 “한국 국민의 공정성에 대한 욕구가 더 크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동서(東西) 사상의 용광로에서
그러나 샌델 열풍이 『정의의 아이디어』 번역을 가로막았다고 보는 건 중요한 측면을 간과한 것이다. 번역자인 이규원 박사가 고백한 것처럼 “옮긴이의 손에 오기까지도 적지 않은 난항을 겪은 것으로 알고 있다. 철학, 법, 정치, 경제를 포괄하는 사상적 기반이 만만치 않았고 센의 유려하고 섬세한 문체적 특징은 오히려 번역 과정에서 난관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에 등장하는 주인공 핍은 “아이들이 존재하는 작은 세계에서 부정의(injustice)만큼 잘 이해되고 잘 느껴지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의 번역이 늦어진 데는 서양문화와 인도문화의 혼합 용광로를 거쳐 형성된 센 특유의 사유적 특성이 작용한다.
센의 책이 출간된 직후 학계에서 제기된 흥미로운 반응을 하나 들어보자. 크리스 브라운 런던정경대 교수는 <윤리와 국제 문제>(2010년 가을호)에 발표한 「아마르티아 센과 ‘정의의 아이디어’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센은 계몽주의 가치들을 강력히 지지하지만, 이들 가치들이 본질적으로 서구적 방식들에 연계된 것이라는 생각에는 강력하게 저항했다. 이성, 정의, 그리고 자유는 비서구세계가 인지하고 충실히 지켜야 할 유일무이한 서구의 아이디어들이 아니다. 센에게 그것은, 인류의 보편 유산의 일부다.” 센이 이성, 정의, 자유의 개념을 서구 제국주의 산물로 폄하하는 탈식민이론이나 서구 승리주의를 부정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이해 위에서 센은 책의 앞머리에 저 유명한 고대 인도의 법학에 등장하는 두 개념, 바로 ‘니티(niti)’와 ‘니야야(nyaya)’간의 중요한 구별을 가져왔다. “니티라는 개념은 조직의 적절성 및 행위의 정당성과 관계되어 있는 반면 니야야는 벌어지는 일과 그 방식, 특히 사람들이 실제로 영위할 수 있는 삶과 관계가 있다. (……) 정의의 아이디어가 도모해야 하는 공정성(justness)에는 서로 무관계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다른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센은 니야야와 니티의 구별은 한 국가 내에서뿐만 아니라 국경 너머까지 의의를 가진다고 설명한다. 어째서 정의의 문제가 국경을 넘어 ‘국제적 차원’에서 다뤄져야 하는지를 암시하는 대목이다.
교양강의에 기댄 샌델의 책과 달리 센의 『정의의 아이디어』는 완전한 학술적 구성과 체계를 잡고 있다. 또한 스스로 밝혔듯 이 책은 ‘존 롤스’라는 정의론의 앞선 선배 거인에게 헌정한 지적 작업이며 동시에 ‘롤스와 그 학파와의 암묵적 대화’이기도 하다. 아카데미즘의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사정은 저명한 법학자이자 정치사상가인 로널드 드워킨 전 옥스퍼드대 교수의 필생의 역작 『정의론(Justice for Hedgehogs)』(하버드대출판부, 2011)이 2015년에 국내에 번역, 소개됐다는 점에서 정당한 지연 사유가 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정의의 아이디어』가 소개되는 데 10년 걸린 것일 뿐, 센의 여타 책들은 진작부터 소개돼 왔다. 『불평등의 재검토』(1999, 2008), 『자유로서의 발전』(2001, 2013), 『윤리학과 경제학』(2006, 2009),『센코노믹스, 인간의 행복에 말을 거는 경제학』(2008), 『정체성과 폭력』(2009), 『GDP는 틀렸다』(조지프 스티글리츠, 장 폴 피투시와 공저, 2011), 『세상은 여전히 불평등하다』(2018) 등이 국내에서 만날 수 있는 그의 책 리스트다.
10년 만에 제대로 만나게 된 이유
그렇다면 센의 『정의의 아이디어』가 10년 만에 한국의 독자들 앞에 나타난 혹은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무엇일까? 센의 책은 홉스, 로크, 루소, 칸트로부터 롤스, 노직, 고티에, 드워킨에 이르기까지 사회계약론적 전통을 계승하는 주류 정치철학의 비판에서부터 출발한다. 센이 자신의 고향에서 가져온 ‘나야야(nyaya)’를 상기해보자. 이것은 훨씬 넓고 포괄적이다. 크리스 브라운 런던정경대 교수가 읽어낸 것처럼 “이것은 제도 자체에 직접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우리가 만드는 제도로부터 출현하는 세계를 바라”보는 개념인데, ‘나야야’를 원용한 센은 유럽 사상의 계보에 이를 적용했다.
즉 홉스, 로크, 루소, 칸트와 같은 이론가와 가장 최근의 롤스 등이 ‘정확한 제도’의 수립을 모색했다면, 애담 스미스, 콩도세르, 울스턴크래프트, 벤담, 마르크스, 밀 등 사회선택이론의 계보에 있는 사상가들은 좀더 비교 접근법을 취해 사회적 실현을 전체론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사회적 실현이 비단 제도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인간 행동을 비롯한 다른 요인들의 산물이기도 함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센은 완벽히 정의로운 사회를 정의하거나 이를 가능하게 하는 ‘완벽한 제도’를 제시하려 애쓰기보다 눈앞에 보이는 명백한 부정의(injustice)를 제거함으로써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정의를 촉진할 수 있는지, 정의에 대한 상대적 관점과 대립되는 문제들은 어떻게 다뤄야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역설하게 된다.
어쩌면 아마르티아 센의 이러한 접근은 그간 서구사상을 지배해왔던 백색의 형이상학으로부터 그 스스로가 자유로웠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철학, 법, 정치, 경제, 보건 등 학문 전반을 아우르며 빈곤, 기아, 젠더, 소수자, 불평등, 복지 등 반세기에 걸쳐 아마르티아 센이 천착해온 인류의 문제는 지금 바로 이곳, 한국 사회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뿌리 깊은 차별과 혐오, 소수자에 대한 증오는 ‘서로 다른 인식의 공존’을 불가능하게 한다. 롤스의 이상적 정의의 추구보다 부정의를 제거하는 실천적 노력을 강조하는 센의 제안은, 롤스, 샌델, 드워킨을 지나 이제 막 한국 사회에 도착했다.
‘부정의(不正義)’ 해결에 역점
칸트보다 애덤 스미스의 계보
주류 정의론 풍부하게 ‘보완’
빈곤·기아 등 국제적 대처 강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