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워라밸, 이상과 현실

이영환 이화여대 교수ㆍ철학 : 서양고대철학을 전공했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Aristotle and Determinism」으로 박사 학 위를 받았다.

노동의 목적은 여가, 여가는 행복

“행복은 여가 안에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여가를 갖기 위해 여가 없이 바쁘게 움직이며, 평화를 얻기 위해 전쟁을 하기 때문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10권 7장


아리스토텔레스는 “노동의 목적은 여가”라고 말하면서 행복을 여가와 연결시킨다. 이 말이 너무나 상식적으로 들리는가? 위 인용글을 보며 일주일 내내 힘들게 일하고 주말에 소파에 누워 TV를 보며 쉬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누군가가 생각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언제 철학자들이 그렇게 상식적인 주장을 하던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여기서 말하는 여가와 행복은 우리가 이해하는 그 여가, 그 행복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우리에게 상식을 뛰어넘는 메시지를 줄 수 있다.


행복은 주관적 느낌이 아니다
우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은 우리의 ‘행복’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에게 ‘행복’은 즐겁고 편안하고 긍정적인 느낌이다. 느낌이란 말이 함축하듯, 우리에게 있어 행복은 주관적인 어떤 것이다. 여기서 ‘주관적’이라는 말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다면, 어느 누구도 “아니야, 사실 너는 행복하지 않아”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잘 삶’과 동일시하면서 행복이 주관적인 것임을 부인한다. 그리고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삶에서 추구하는 중요한 가치로서의 행복이 그저 주관적이지는 않다는 그의 생각에 수긍할 수 있다.
한창 연애를 하고 있는 어떤 사람 A를 상상해보라. 연애 상대와 만나기로 한 약속 때문에 A는 이미 가슴이 설레고, 세상이 아름답게만 보인다. 그런데 이럴 수가! A의 연애 상대 B는 A 몰래 바람을 피우고 있는데 철저한 용의주도함과 배우급 연기력으로 A를 완벽히 속이고 있다. 이런 경우, 다시는 없을 것만 같은 행복감에 취해있는 A의 현재 삶은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A가 철저하게 속아 더 깊은 행복감을 더 오래 더 강하게 느낄수록, 진실과는 멀어진 A의 삶은 더욱 더 비참한 삶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한 삶, 잘 사는 삶은 주관적인 행복감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가, 쉬는 것도 노는 것도 아니다

“수고하는 사람에게는 휴식이 필요하고 놀이는 휴식을 위해 있는 것이어서 놀이는 일할 때 더 유용한 것이다. ... 우리는 놀이를 적절한 시점에 사용해야 하는데 약을 투약하는 것처럼 주의하면서 놀이를 허용해야 한다. ... 그러나 여가를 누린다는 것은 즐거움과 행복과 축복받은 삶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정치학』8권 3장

아리스토텔레스의 여가의 개념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여가 개념과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가를 그저 쉬는 것이나 노는 것과 구별한다. 그는 노동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놀이도 인생의 목적일 수 없다면서, 여가로부터 노동과 놀이를 구별한다. 놀이 또는 휴식은 노동을 위해 있는 것이고 노동은 다시 여가를 위해 있는 것인데 여가는 다른 어떤 것을 위한 것이 아니다.

행복과 여가는 최고선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과 여가 둘 다 무언가를 안 한다는 의미에서 소극적이거나 외부로부터 무언가를 받아들이기만 한다는 의미에서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활동이며, 다른 어떤 것을 위해 존재하는 수단적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강조한다. 사실 우리가 삶에서 궁극적으로 좋은 것으로 추구하는 그 어떤 것도 개념상 수단적 가치를 가질 수 없다. C가 D를 위한 좋은 수단이라서 가치를 가지는 것이라면, C는 궁극적으로 좋은 것일 수 없다.
이런 간단한 수단-목적 분석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리 가볍지 않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우리의 삶에서 때로 궁극적인 가치로 오인되는 돈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무엇을 사기 위해 돈을 필요로 하지, 돈 그 자체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기술의 발달로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엄청나게 늘어난다고 해서 돈이 본질적으로 무언가를 사기 위한 수단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분석은 돈이 삶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 삶에서 궁극적인 가치(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최고의 좋음’또는 ‘최고선’이라 부른다)로서의 행복과 여가가 목적성을 가질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또한 자족적(self-sufficient)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그가 의미하는 행복과 여가는 우리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행복과 여가의 놀라운 반전
그런데 노동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놀이는 어떨까? 직장인이 주말에 쉬거나 여흥을 즐기는 것은 다시 월요일에 일터로 나가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들이 노는 것처럼 다른 어떤 것이 아닌 행위 그 자체 안에 행위의 목적을 담고 있는 놀이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혹시 놀이와 노동, 그리고 여가가 분리되지 않는 삶이 가능하지는 않을까? 그리고 그런 삶이 만약 가능하다면 그 삶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삶, 가장 잘 사는 삶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놀이’, ‘노동’개념을 벗어난 것이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아리스토텔레스가 의미하는 행복과 여가가 무엇이 ‘아닌가’를 이야기했는데, 그렇다면 과연 그에게 있어 행복과 여가란 무엇‘인가’? 안타깝지만 여기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본격적으로 다룰 수는 없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신적인 행복, 신적인 활동이라고까지 묘사하는 진정한 행복과 여가가 배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만 지적해야겠다. ‘여가’를 의미하는 영어 ‘leisure’는 그리스어 schol의 번역인데, 이것은 ‘school’의 어원이다. 배움이 노동의, 그것도 아주 마지못해 하는 노동의 일부분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은 현대 문화를 놓고 볼때 놀라운 반전이 아닌가?


‘여가’를 의미하는 영어 ‘leisure’는 그리스어 schol의 번역인데,
이것은 ‘school’의 어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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