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모이면 즐거운 이름, 친구

40여 년 전이다. 나는 부산에서 마산외국인아파트(구 대한주택공사 부산지사 소속)로 발령이 나면서 재숙이와 인연을 맺게 됐다. 그녀는 나보다 한 살 아래였지만, 우리는 꺼릴 것 없이 친구가 됐다. 경남 창녕군 남지읍 시장에서 방앗간을 하던 그의 집에도 자주 놀러 가면서 우정을 쌓았다. 재숙은 1982년 큰오빠의 초청으로 가족 모두가 미국으로 떠났다. 나는 남편의 직장 특성상 이동이 잦았고, 또 아이를 키우느라 바빠서 재숙을 잊고 지냈다. 그리고 다시 재숙과 연결된 것은 오랜 시간이 흘러서였다.


2012년 우리 부부는 미국에청소년교육과를 마치고 중어중문학과를 선택해서 공부하고 있는 강 학우는 주변 지인들에게 방송대를 권유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그의 권유와 추천으로 방송대에서 공부하고 있는 점점 늘고 있다. 있는 친척을 방문하게 됐다. 남편만 귀국하고 나는 혼자 필라델피아로 가서 재숙이를 만났다. 20대 후반에 만났던 친구는 어느덧 40대 후반의 ‘한국계 미국인’이 돼 있었다. 그녀는 정말 열심히 살고 있었다. 집과 가게, 그리고 한국인 주지 스님이 있는 사찰만 오가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 후로 우리는 카톡과 보이스톡 덕택으로 더욱더 풍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2015년 방송대 청소년교육과에 입학해 공부하고 있던 나는 재숙이에게 방송대에 다니면서 느낀 장점들을 하나씩 알려줬다. “나도 한 번 해볼까?”라는 말이 신중한 재숙이의 입에서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지만, 친구가 들려주는 그 목소리에는 확고함과 의지가 담겨있었다. 2016년 재숙이는 방송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가게와 집이 생활 전부였던 재숙이의 삶이 다시 바뀌기 시작했다. 가게 책상에서 틈을 내 공부하고, 걸어 다니면서 리포트를 구상했고, 머나먼 한국을 1년에 두 차례나 오가기 시작했다. 그런 재숙이의 향학열이 불타오르면서 우리는 잃어버렸던 정서를 되찾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재숙이가 사용하는 ‘낱말’이 달라지기 시작했으며, 표현해내는 정서의 깊이가 두터워졌다.


50대 중후반에 시작한 공부가 어디 쉬울 수 있겠는가? 들어보니 재숙이도 교양과 전공과목을 들으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잊고 살았던 그 아름답던 우리의 일상 어휘들이 새싹 자라듯 꼬리를 물면서 벙어리 말문 터지듯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는 스터디와 봉사 모임 등에 재숙이를 ‘미국에서 방송대에 다니는 친구’라고 소개하면서, 그녀의 자존감을 끌어올림과 동시에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지원했다. 나의 임무(?)는 교과서나 교양서, 참고도서 등을 구해서 재숙이가 공부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최대한 빨리 항공편으로 보내주는 것이었다.


2019년 나는 방송대 청소년교육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가서 재숙이 집에 한 달간 머물렀다. 친구는 그간의 방송대 공부가 자신의 삶을 얼마나 변화시켜 놓았는지를 마음껏 들려주었다. 한국을 찾는 방문 횟수가 늘수록 순진하고, 철없고, 깔깔대던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는 친구를 보면서 대견스러웠고, 보람마저 들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자신감에 차 있는 듯한 당당함이 느껴진다.


재숙이는 지난여름 졸업장을 받았다. 그녀는 졸업이 끝이 아니고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말했다. 방송대의 좋은 강의를 신청해서 계속 들을 것이라고 한다. 그 말 또한 얼마나 달콤하게 들렸는지 모른다. 재숙이는 은행에서 대출 좀 받아 가라고 권유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자립했다. 신앙심도 깊다. 미국 시민으로서 한국인의 위상을 높이며 잘 적응하고 있는 친구가 자랑스럽다. 40년 이상 잃어버렸던 한국인의 정체성을 완전히 인식하는 계기가 된 것도 ‘방송대 공부’였다는 데 우리 둘은 의견을 달리하지 않는다.

 

재숙이가 뜻밖의 말을 건넸다. 자신의 다음 목표 가운데 하나는 캐나다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방송대를 권유하는 일이란다. 그가 관심을 보이니 지금처럼 언택트가 가능하다면, 적극 추천하겠다고 한다.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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