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폴리매스(polymath)는 여러 주제에 대해 광범위하게 알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 방대하고 종합적인 사고와 방법론을 지녔으며, 이를 통해 연관 없어 보이는 분야들을 연결해 돌파구를 만들어내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끝없는 호기심과 뛰어난 지능, 놀라운 창의력으로 한계를 뛰어넘으며, 자아실현마저 성취하는 충만한 인생을 산다.
대부분 사람이 폴리매스라고 하면 만능인으로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떠올린다. 역사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개인 중 상당수가 다능하고 박식한 폴리매스였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떠오르는 청년 다빈치’로 평가받는 와카스 아메드가 『폴리매스』(이주만 옮김, 로크미디어, 2020)에서 유형화한 역사 속 폴리매스 위인들을 소개한다.
킹메이커형: 대문호 괴테
유럽의 낭만주의 운동을 이끈 인물 중 하나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는 세계 문학계의 거장으로 손꼽힌다. 그는 소설과 희곡, 시를 쓰는 작가로 명성을 얻었지만, 변호사, 궁정 관료, 철학자로도 활약했으며 생물학, 식물학, 물리학 같은 과학 분야에서도 상당한 업적을 이뤘다. 괴테는 처음에는 소묘와 수채화를 그리는 화가로 경력을 쌓았지만, 라이프치히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프랑크푸르트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프랑스와 전쟁 시기에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의 군사고문이 되어 종군했고, 관료가 돼 궁정에서 일하던 시기에 문학에 대한 열정을 키워갔다.
괴테가 전설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한 것은 그가 과학 분야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올렸기 때문이다. 그는 먼저 생물학에서 방대한 조사를 통해, 식물의 지속적인 변형을 관찰한 결과를 내놓았고, 훗날 ‘상동 관계’로 불리며 한 세기 뒤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저술할 때 이 개념을 사용하기도 했다. 괴테는 이론 물리학에도 관심을 보이며 1810년에 『색채론』을 발표하기도 했다. ‘침철석(goethite)’은 광물학에도 심취했던 그의 이름을 땄다.
킹메이커는 꼭 왕실의 고문으로 그가 섬기는 황태자가 왕위를 계승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궁정인으로서 재능과 능력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군주를 보좌하며 왕실의 위엄을 지키는 역할을 맡는다. 지식인이자 예술가로서 다양한 분야에 걸쳐 왕실에 의견을 제시하는 고문이나 행정가 혹은 궁정 소속 예능인으로 활동하는 이들이 모두 킹메이커라는 점에서 괴테는 경계와 한계가 없는 활약을 펼쳤다.
탐험가형: 자연과학자 훔볼트
현대사에서 첫손에 꼽히는 박식한 자연과학자 알렉산더 폰 훔볼트(1769~1859)는 ‘과학 분야의 마지막 만물박사’로 불리고 ‘18~19세기의 위대한 통합적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훔볼트는 식물학, 지질학, 인류학, 해양학, 동물학, 해부학을 비롯한 자연과학 분야에서 엄청난 발자취를 남겼다. 5년에 걸쳐 라틴아메리카의 방대한 지역을 조사했고, 러시아에서 탐험한 거리는 장장9천 마일에 이른다. 탐험 중에 수집한 자료를 정리해 21년에 걸쳐 수많은 책으로 편찬했다. 특히 다섯 권으로 출간한 대표작 『코스모스』에서 여러 분야의 과학 지식을 통합하려고 시도했다. 또한 그는 열정적인 언어학자로서 자신이 여행한 지방의 다양한 방언들도 공부했다.
모든 탐구는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어느 사회든 또 어느 왕실이나 기업이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탐사를 의뢰했다. 하지만 원정을 떠나는 탐험가는 새로운 것을 발견할 가능성만을 본다. 그렇다고 특정한 것을 찾는 게 아니다. 탐험가는 찾는 과정 그 자체를 즐긴다. 무언가를 발견하고 나면 또다시 새로운 것을 찾는 탐험을 계속한다. 탐험가 중에 폴리매스가 많은 이유다.
예술가형: 아방가르드의 선구자 장 콕토
화가이자 조각가, 건축가, 시인이었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문화란 본래 예술가들이 다방면에 걸쳐 재능을 발휘할 것을 요구한다. 20세기 가장 뛰어난 종합 예술인으로 꼽히는 장 콕토(1889~1963)는 1900년대 초에서 중반까지 아방가르드 문화를 대중에게 알린 사람으로 유명하다. 19세기 후반 발명되고 보급된 활동사진과 영화는 시각 예술, 공연 예술, 문학 예술 전반에 걸쳐 특출한 역량을 지닌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놀이터가 됐다.
장 콕토는 작가로서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해 50편이 넘는 시를 발표했고, 20편이 넘는 희곡으로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으며, 6편의 영화를 감독했다. 특히 오르페우스 3부작에서는 본인이 직접 배우로 출연했으며, 의식과 무의식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프랑스 영화의 본보기로 꼽힌다. 콕토가 시각 예술 분야에서 남긴 작품도 이에 못지않게 뛰어나다. 연필화, 크레용화, 파스텔화, 유화, 펜과 잉크 드로잉부터 포스터, 벽 장식, 판화, 도자기와 태피리스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을 창작했다. 20세기 중반 화려한 프랑스 사교계에서 돋보였던 그는 발레와 도장 디자인, 조각에도 취미가 있었다.
지식인형: 세계의 목소리 촘스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의 저명한 언어학 교수이자 철학 교수인 노엄 촘스키는 현존하는 폴리매스 지식인의 대표적 사례다. 그의 논문 피인용 지수는 모든 저술가 가운데 언제나 상위권에 들어간다.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각기 다른 4개의 분과 학문에서 동일한 수준으로 그의 논문이 인용된다는 점이다. 촘스키는 언어학(특히 통사론)부터 인지과학, 철학, 지식의 역사, 수학, 사회학, 정치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에 관해 150권이 넘는 책을 썼다.
그가 자신의 견해를 담은 책을 낼 때마다 세계는 그의 목소리에 주목한다. 오늘날 촘스키는 강사로서도 인기가 매우 높다. 일각에서는 촘스키를 정치적으로 논란이 많은 인물로 평가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조차 촘스키가 현존하는 전방위 지식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로 손꼽힌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지식인이란 대체로 철학가, 역사가, 과학자 심지어 소설가로 활동한다. 이들은 인류 역사를 바꾼 사상이나 개념을 생산하거나 발전시킨다. 지식인 중에서도 뛰어난 폴리매스는 생각에 경계를 두지 않는 이들이다. 여러 학문을 넘나드는 지식과 사상, 개념을 배울 뿐 아니라 서로 연관 없어 보이는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해 학문 발전에 기여한다.
변신의 귀재형: 실학자 정약용
18세기 정조 시대 실학자 정약용은 수원 화성을 설계한 도시 공학자였고, 경기도 암행어사로도 활동했다. 정약용은 일찍이 아홉 살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시인으로도 이름이 높았는데, 특히 그의 시는 19세기에 다도 문화가 부흥하는 데 일조했다. 정조 이후 천주교 신도를 박해하면서 정약용은 유배됐다. 그는 유배 생활 중에 정치에서 철학, 경제, 자연과학, 의학,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에 관해 무려 500여 권에 달하는 책을 지었다.
유배지에서 돌아오고 나서는 법학(『흠흠신서』), 언어학(『아언각비』), 외교(『사대고례산보』, 통치술(『목민심서』), 행정(『경세유표』)에 관해 중요한 저작을 완성했고 책으로 묶었다. 정약용은 상이한 환경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재설계하는 능력을 보였다. 이는 정약용의 뇌가 아주 놀라운 가소성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인간의 뇌는 약 1천억 개의 뉴런으로 구성돼 있고, 각 뉴런은 최소 1천여 개의 시냅스를 통해 무한에 가까운 방식으로 상호작용한다. 또한, 뇌는 이종교배를 가능하게 하는 가소성도 가지고 있다. 정약용은 다양한 경험에서 쌓은 지식으로 한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한 폴리매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