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12월 방송대 조
교수로 시작하셨습니다. ‘퇴임’을 맞으신 소회가 궁금합니다.
프랑스 문학에 매료돼 중학교 때부터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겠다는 꿈을 가졌는데 방송대에서 그 세계의 다양한 내용을 학우들과 나누면서 삶의 긴 시간을 한결같이 지내왔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학과의 학생 수가 적어서 학교 당국에 늘 미안한 마음이기도 했다. 학내 보직 수행보다는 프랑스 문학을 깊이 있게 소개해 대중 속의 인문학을 진작하는 길이 학교에 봉사하는 데 더 걸맞다고 생각해 강의와 연구 외에는 번역에 시간을 할애했다. 방송대 교수의 이름으로 프랑스 현대문학 중요 작품들의 번역서들을 냄으로써 나름대로 학교와 학과를 알리는 데 일조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평생의 영화 인생을 마감하며 근년 91세의 나이로 타계한 프랑스의 명 감독 아녜스 바르다가 자전적 회고 다큐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칸 영화제 명예 황금종려상 수상)에서 프랑스의 상상력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의 철학서 네 작품을 거명했는데, 그중 두 작품을 국내 번역한 나로서는 그간의 모든 시간을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사실 논문 집필과 달리 번역은 연구성과로 간주되지도 않던 시절에 한 책당 족히 8~9년이 걸리는 시간 동안 우직하게 매달려야 했다. 말이 나온 김에 이어가자면 인문학 관심자들에게 폭넓은 영감을 주는 바슐라르 외에도, 내가 공부한 작가의 대표작 번역에도 오래 시간을 쏟았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깊이 영향을 받고 여러 차례 인용하신 작품이기도 하다. 이 세계적 지도자의 방한 때 한국어 번역물을 선물 드리게 됐고 이어 다른 문집 발간을 계기로 당신의 격려 서신까지 받게 됐다. 이 모든 것이 방송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나름 수행한 외연 활동과 관련된 것이기에 방송대에서의 재직 시절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방송대 선택에 후회는 없으신지요?
1985년 2월, 프랑스에서 돌아오자 한 은사님께서 방송대에 막 불어불문학과가 개설됐다고 소개해주셨다. 다른 은사님들은 이른바 정통파 캠퍼스형 대학을 권유하셨으나 나는 단 한 순간도 망설임 없이 방송대를 택했다. 준비가 많이 필요한 방송 강의가 처음부터 의외로 즐겁고 재미있었다. 방송대 재직 초기, 7년 넘게 서울의 한 대학에 지속적으로 출강을 했으나 우리 대학의 출석수업에서 만나는 학우들의 놀라운 집중도와 열띤 호응에 고무돼 다른 대학으로의 이직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 대학 소개를 하게 되는 다양한 경우 내가 늘 언급하는 첫 마디는 ‘참 좋은 대학’이다.
오래 강단에 계셨는데 특히 기억나는 제자가 있다면?
프랑스 문학 전공 쪽으로 나아간 졸업생도 간혹 있으나 학과 초창기 재학생으로 유난히 따르던 한 학우가 늘 마음에 있다. 졸업 후 프랑스에서의 유명한 학교에서 제빵 제과를 공부하고 돌아와 내가 작명해 준 이름을 달고 서울에서 빵집을 직접 경영한 여학우다. 과로 끝에 건강이 어긋나 고생하고 있으나 마음만큼은 그 누구보다 넓고 명랑한 달관자다. 파리에서 만났을 때 조리 실습 중 화상을 입었다며 손을 보여주던 모습이 휠체어를 탄 현재의 모습과 늘 겹쳐 떠오른다. 한편 졸업 후 심리학을 전공해 학자의 길로 들어선 학우도 방송대 불어불문학과가 토대가 됐다며 새 책을 낼 때마다 보내온다. 지방의 중학교 상담교사로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졸업생도 삶의 도반처럼 여겨진다.
많은 과목을 강의해 오셨는데 기억나는 강의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강의 인력이 절대 부족하던 초창기, 서울대에 재직하던 선배 교수들이 번갈아 우리 학과 고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프랑스 소설’을 강의했다. 그것을 바로 이어받아 여러 중요한 작가들의 원작을 학생들과 20년도 넘게 재미있게 원문 강독을 했는데, 10년 전부터는 「카뮈와 위고 선독」이라는 이름으로 개편해 수업해 왔다. 누구나 이름은 알지만 깊이 있게 또 정밀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페스트』와 19세기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중점 강독하는 과목이다. 수강생들은 3학년 2학기에 이런 명작 원문 강독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몹시 자긍심을 가진다. 특히 코로나19 재난 시기에 『페스트』를 원전으로 읽은 학우들은 이른바 ‘고전’ 작품의 세월을 넘어서는 중후한 존재감과 그 의미를 깊이 느끼게 된 것 같다. 「카뮈와 위고 선독」 강의에 앞선 학기에서 찬찬히 효율적으로 걸어보게 되는 중세부터 현금까지의 「프랑스 문학 산책」도 타 대학에서 우리 교재를 많이 선택하고 있다.
1학년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한 「프랑스어 기초문법 연습」은 타과 수강생들까지 크게 호응해 준 과목이다. 동시대의 석학 에릭 오르세나가 『문법은 아름다운 노래』라는 소설을 통해 프랑스 학생들에게 프랑스어 문법 접근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것을 인용하면서, 문법이 딱딱한 하드웨어로 남는 것이 결코 아님을 공감시키기에 성공했던 것 같다. 아울러 학생들에게 사전 활용의 중요성을 강조하곤 하는데 한국불어불문학회 공동 편찬 『한불사전』간행에 필자로서 일조할 수 있었던 것도 재직기간의 일로 소중하게 생각한다.
교수는 우수한 인재를 길러내는 소명을 부여받은 존재입니다. 특히 ‘방송대 교수’로서 지녀야 할 미덕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재외 국민까지 아우르는 전 국민의 평생고등교육기관이라는 소중한 소명을 가진 국내 유일의 국립 원격대학의 교수라는 입지를 늘 기억하고 실천하는 일일 것이다. 존중받아 마땅한 다양한 학우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진심으로 교감하려는 자세만 있다면 원격교육이라 하더라도 강의 방식, 강의 내용, 자세 등에서 이 가치는 그대로 반영돼 전달될 것이다.
학교에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깊이 있는 평생교육의 장을 찾아 그간 우리 대학을 선택한 진객들이 정말 많지 않은가. 불어불문학과 시절부터 프랑스언어문화학과로 개칭한 지금까지 우리 학과에도 이를테면 신학 박사학위를 가진 종교인들을 비롯해 의사 및 여러 전공의 고학력자들도 많았다. 한편으로는 프랑스와 유럽, 서구 문화에 대한 관심에서 문을 두드리는 젊은이들이 늘 주류를 이룬다. 한결같이 인문학의 향기에 이끌려 또 문화어로서의 프랑스어의 필요성을 절감해서 입학하신 분들이다. 그런가 하면 최근에는 ‘아프리카 프랑스어권 문화학과’로 활짝 열린 대학원과의 연계를 좋은 기회로 생각해 학부를 찾는 입학생들도 늘어나는 추세다. 비록 학생 수가 적지만 소명 의식을 가지고 이런 분들이 끊임없이 이어 찾아오시는 본 학과의 존재 이유를 국립대로서의 본교는 긍정적으로 인정하는 우호적 관점을 늘 가져 주기를 바란다. 학교 경영의 어려움도 있겠으나 소규모 학과도 보호하며 호혜적 자세로 상호 발전하는 아량을 학교 당국이 견지해 주기를 소망할 따름이다.
학생들게도 덕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아침 식사 준비 중의 주방 식탁에서 카세트테이프를 들어가며 아들과 함께 공부했다는 주부, 교재에 색인 띠지를 붙여가며 문법 요소와 동사 변화형을 암기했다는 육군 대령, 수많은 공학 특허를 가진 경영자……. 이 학우들이 어린 자녀들과 함께 무대에 올라 쩔쩔매며 혹은 호기롭게 프랑스어를 주거니 받거니 경연하던 프랑스어 경시대회나 축제에서 새삼스럽게 재발견하게 되는 그들의 열정이나 삶의 자세에서 감동과 놀라운 신선함을 거듭거듭 느낄 수 있었다. 세월과 함께 원격교육 매체는 많이 바뀌었으나 공부에 대한 열의는 제주에서 백령도까지 한결같음을 모든 학과 교수들과 학우들도 함께 공감하는 우리 대학만의 덕목이다. 이미 여러 사례에서 보듯이 모두들 한 학과 다음에 다른 전공을 이어 공부하는 평생교육의 장으로 평생 재학하시는 만년 청춘이시기를 바란다.”
퇴임은 또 다른 출발이라고들 합니다. 퇴임 이후 계획은 있으신가요?
“밤은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다. / 내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 내가 그렇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슬픔의 끝에는 언제나 / 열려있는 창이 있고 / 불 켜진 창이 있다. / 언제나 꿈은 밤을 지새우고 / 충족시켜야 할 욕망과 채워야 할 배고픔이 있고 / 관대한 마음과 / 내미는 손 열려있는 손이 있고 / 주의 깊은 눈이 있고 / 함께 나누어야 할 삶 / 삶이 있다.”라는 엘뤼아르의 시에서처럼 간결하게 그러나 진솔하게 인간 형제들을 향해 손을 내밀어 삶을 나누고 싶다. 이 시의 제목(「그리고 미소를」)처럼 ‘그리고 미소가’ 더하는 시간이 주어지길 소망할 뿐이다.
정영란 교수의 주요 저술로는 공저논문집 『프루스트와 프랑스현대소설』『20세기 프랑스 소설연구』등을 썼다. 주요 번역서로는 바슐라르의 『공기와 꿈-운동에 관한 상상력 시론』『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내밀성의 이미지 시론』, 베르나노스의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등이 있다. 특히 『공기와 꿈』은 <한국일보> 선정 올해(1993)의 최고 번역상 최종 후보로 지명(차등에 해당)되기도 했다. 그는 방송대에 35년 2개월 근속해 퇴임과 함께 녹조근정훈장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