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숙 시인·국어국문학과 졸업
가슴을 따듯하게 하는 그분들
유록의 산빛이 어여쁜 이즈막이다. 대학에 입학하던 그 해를 잊을 수가 없다. 내 인생의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다. 시집을 한 권 낸 후 ‘모국어를 잘 모르고 무엇을 쓰는가’ 싶어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한 가정의 아내로 엄마로 며느리로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학문에 대한 갈증과 호기심은 그 모든 것을 이겨내기에 충분했다. 거의 누워만 계셔야 하는 시어머니를 돌보다가 수업시간을 맞추느라 종종걸음을 했던 때가 어제 일만 같다.
딱딱한 TV강의만 듣다가 출석수업에서 만난 교수님들은 내 안에 자리한 선입견들을 무너뜨렸다. 교수님들은 동문행사에 자주 오셨는데, 한두 마디 오가다가 나는 시어머니 간병과 건강문제 등으로 학업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대해 말씀드렸다. 교수님들께서는 조금만 더 힘내서 해보라고 말씀해 주셨다. 짧은 말 속에서도 느껴지는 온기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 후에도 우리 국문과 교수님은 행사에 오시면 우리들의 마음을 다잡아 주셨다. 고비마다 위기가 왔지만 그 분들의 따듯한 마음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독서감상문 공모전에서 상을 받게 되어, 교수님 몇 분과 식사를 하게 되었을 때 기억이 난다. 직접 뵈니 옆에 앉는 것이 부담스러워 자리를 피하는 내게 환하게 웃으며 앉으라고, 어떤 권위의식도 없이 매일 본 친구처럼 대우해 주셨다. 교수님들의 칭찬과 격려는 ‘내가 계속 시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거두어 주웠다. 만학도인 내게 꿈과 희망, 그리고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해주신 그 분들. 봐줄 사람이 없어 어린아이를 업고 시상식에 왔던 동문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다가 함께 눈시울이 붉어진 날이었다.
“나이가 많아서 이제 더 배울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나의 삶에 아무런 목표나 이상이 없는 상태로, 이미 정신적인 죽음과 같은 것이다.”라는 말처럼 공부를 통해 나는 삶을 ‘살게’ 되었다. 팀을 이루어 과제를 하러 유적지를 찾아 헤매다 어렵게 사람을 만나 채록하고 풀어 정리해 발표했고, 자정이 넘은 시간까지 차를 세 번씩 갈아타며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코피를 흘리면서도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왜일까? 교수님들의 따듯함을 통해 앎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었고 새로운 학문의 세계로 진입해 자아의 확장을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논문을 쓰고 싶었는데 시집으로 대신한 것이다. 교수님을 더 가까이서 뵙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매우 아쉽다. 이런 아쉬움 때문인지 해마다 스승의 날 즈음이면, 4년 동안 나를 채근하여 국문학도로 졸업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교수님들의 따듯한 응원과 가르침이 더욱 더 생각난다. 지금보다 발전된 모습으로 그 은혜에 보답해야겠다.
4년 동안 나를 채근하여 국문학도로 졸업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교수님들의 따듯한 응원과 가르침이 더욱 더 생각난다
유록의 산빛이 어여쁜 이즈막이다. 대학에 입학하던 그 해를 잊을 수가 없다. 내 인생의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다. 시집을 한 권 낸 후 ‘모국어를 잘 모르고 무엇을 쓰는가’ 싶어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한 가정의 아내로 엄마로 며느리로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학문에 대한 갈증과 호기심은 그 모든 것을 이겨내기에 충분했다. 거의 누워만 계셔야 하는 시어머니를 돌보다가 수업시간을 맞추느라 종종걸음을 했던 때가 어제 일만 같다.
딱딱한 TV강의만 듣다가 출석수업에서 만난 교수님들은 내 안에 자리한 선입견들을 무너뜨렸다. 교수님들은 동문행사에 자주 오셨는데, 한두 마디 오가다가 나는 시어머니 간병과 건강문제 등으로 학업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대해 말씀드렸다. 교수님들께서는 조금만 더 힘내서 해보라고 말씀해 주셨다. 짧은 말 속에서도 느껴지는 온기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 후에도 우리 국문과 교수님은 행사에 오시면 우리들의 마음을 다잡아 주셨다. 고비마다 위기가 왔지만 그 분들의 따듯한 마음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독서감상문 공모전에서 상을 받게 되어, 교수님 몇 분과 식사를 하게 되었을 때 기억이 난다. 직접 뵈니 옆에 앉는 것이 부담스러워 자리를 피하는 내게 환하게 웃으며 앉으라고, 어떤 권위의식도 없이 매일 본 친구처럼 대우해 주셨다. 교수님들의 칭찬과 격려는 ‘내가 계속 시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거두어 주웠다. 만학도인 내게 꿈과 희망, 그리고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해주신 그 분들. 봐줄 사람이 없어 어린아이를 업고 시상식에 왔던 동문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다가 함께 눈시울이 붉어진 날이었다.
“나이가 많아서 이제 더 배울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나의 삶에 아무런 목표나 이상이 없는 상태로, 이미 정신적인 죽음과 같은 것이다.”라는 말처럼 공부를 통해 나는 삶을 ‘살게’ 되었다. 팀을 이루어 과제를 하러 유적지를 찾아 헤매다 어렵게 사람을 만나 채록하고 풀어 정리해 발표했고, 자정이 넘은 시간까지 차를 세 번씩 갈아타며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코피를 흘리면서도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왜일까? 교수님들의 따듯함을 통해 앎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었고 새로운 학문의 세계로 진입해 자아의 확장을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논문을 쓰고 싶었는데 시집으로 대신한 것이다. 교수님을 더 가까이서 뵙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매우 아쉽다. 이런 아쉬움 때문인지 해마다 스승의 날 즈음이면, 4년 동안 나를 채근하여 국문학도로 졸업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교수님들의 따듯한 응원과 가르침이 더욱 더 생각난다. 지금보다 발전된 모습으로 그 은혜에 보답해야겠다.
4년 동안 나를 채근하여 국문학도로 졸업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교수님들의 따듯한 응원과 가르침이 더욱 더 생각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