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춘화(생활과학과 졸) - 1961년 ‘효녀 심청 되오리다’로 데뷔. 대표적인 히트곡으로는 ‘영암 아리랑’ ‘물새 한마리’ 등이 있다. 현재까지 150여 장의 앨범을 통해 2500여 곡을 발표했고 8천5백회 이상의 공연을 했다. 2016년 ‘자랑스러운 방송대인상’을 수상했다.
어려운 난관을 통과해야 할 때마다 방송대에서 공부했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인생에서 여러 번 힘든 시기를 겪었지만, 돌이켜보면 방송대에서 공부했던 4년은 ‘즐거운 고통’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눈 뜨고 조는 경험을 할 정도로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방송대 공부를 했습니다. 단순히 ‘학사’ 학위를 따기 위해서가 아니라, 방송대에서 공부하는 ‘위대한 보통 사람들’을 본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위대한 보통 사람들’은 아기를 업거나 손자의 부축을 받으며 기말시험을 치르러 오기도 했습니다. 또 강의 테이프를 하도 들어 귀에 이명증이 생긴 분도 본 적이 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공부에 열중하도록 만들었는지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것은, 그분들이 삶을 살아가는 방법, 즉 열정적인 자세였습니다. 이러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들을 전국의 방송대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 분들을 보면서, 대중가요를 부르는 가수라는 직업이 더욱 자랑스러웠습니다. 그 ‘위대한 보통 사람들’이 바로 대중이니까요. 대중가요는 ‘인간의 희노애락을 3분으로 압축한 예술’입니다. 그들의 고단한 심정이 저의 노래로 위로를 받거나 힘을 얻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큰 기쁨입니다. 저는 방송대를 통해 대중 없이는 저도 없다는 것, 그들의 호응과 공감을 얻어야 저의 ‘예술’이 완성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성균관대에서 대중가요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는 동기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박사학위를 준비하면서 몇 번이나 좌절했는지 몰라요. ‘진이 빠진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논문을 쓰면서 눈의 기름샘이 말라버려 아침에 일어나면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안과 신세도 많이 졌어요. 하지만 일단 의자에 앉으면 엉덩이가 무감각해질 정도로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가수ㆍ주부ㆍ학생이라는 1인 3역은 저만 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노력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과 언니 동생 그리고 남편의 지지와 격려 덕분이었기도 했지만, 시험장에서 보아왔던 방송대 사람들 때문인 것 같습니다. 1961년 만 6살에 데뷔한 이래 수많은 무대에 섰고, 수도 없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잊히지 않는 것은 고개를 숙이고 시험지를 집중해 풀던 그분들의 뒷모습입니다. 저를 이렇게 단련시킬 수 있었던 것은 8할이 그 ‘위대한 보통 사람들’입니다.
이 ‘위대한 보통 사람들’은 아기를 업거나 손자의 부축을 받으며 기말시험을 치르러 오기도 했습니다. 또 강의 테이프를 하도 들어 귀에 이명증이 생긴 분도 본 적이 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공부에 열중하도록 만들었는지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것은, 그분들이 삶을 살아가는 방법, 즉 열정적인 자세였습니다. 이러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들을 전국의 방송대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 분들을 보면서, 대중가요를 부르는 가수라는 직업이 더욱 자랑스러웠습니다. 그 ‘위대한 보통 사람들’이 바로 대중이니까요. 대중가요는 ‘인간의 희노애락을 3분으로 압축한 예술’입니다. 그들의 고단한 심정이 저의 노래로 위로를 받거나 힘을 얻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큰 기쁨입니다. 저는 방송대를 통해 대중 없이는 저도 없다는 것, 그들의 호응과 공감을 얻어야 저의 ‘예술’이 완성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성균관대에서 대중가요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는 동기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박사학위를 준비하면서 몇 번이나 좌절했는지 몰라요. ‘진이 빠진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논문을 쓰면서 눈의 기름샘이 말라버려 아침에 일어나면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안과 신세도 많이 졌어요. 하지만 일단 의자에 앉으면 엉덩이가 무감각해질 정도로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가수ㆍ주부ㆍ학생이라는 1인 3역은 저만 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노력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과 언니 동생 그리고 남편의 지지와 격려 덕분이었기도 했지만, 시험장에서 보아왔던 방송대 사람들 때문인 것 같습니다. 1961년 만 6살에 데뷔한 이래 수많은 무대에 섰고, 수도 없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잊히지 않는 것은 고개를 숙이고 시험지를 집중해 풀던 그분들의 뒷모습입니다. 저를 이렇게 단련시킬 수 있었던 것은 8할이 그 ‘위대한 보통 사람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