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세계의 문고본]


로베르 에스카르피는 문고본의 출현을 일러 ‘책의 혁명’이라고 말했다. 문고본을 가리켜 ‘독서시장의 견인차’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문화사적 영향을 미친 문고본의 효시는 어디일까? 독일에서 찾을 수 있다. 전세계에 걸쳐 문고본의 대명사로 불리는 독일의 ‘레클람문고’가 거기 있기 때문.


‘독일문화의 산실’ 레클람문고

1828년 라이프치히에 레클람 출판사를 창립했던 레클람이 아들과 함께 1867년부터 출간하기 시작한 소형 문고판으로, 원래 명칭은 ‘세계문고’였지만, 출판사의 이름을 따서 ‘레클람 문고’로 굳어졌다. 역사가 올해로 152년이 되니 가히 문고본의 산역사라고 할 수 있다.
레클람문고는 독일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문학·철학·종교·미술·음악·정치·법학·경제·역사·지리·자연과학 등 전반적인 명작을 염가로 공급하는 출판 방침으로 독서계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미 세계 최고 기록인 약 7천500종을 출간했을 정도다. 레클람문고를 가리켜 ‘독일문화의 산실’이라고 부르는 건 결코 과장된 평이 아니다. 오죽하면 대문호 토마스 만이 “레클람 없는 독일문화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고 극찬했다는 후문이 돌았을까.
1859년 12권으로 된 셰익스피어 희곡전집을 다른 출판사보다 5분의 1의 저렴한 값으로 내놓은 것이 레클람사를 일약 전국적인 출판사로 명성을 떨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창립 39년 후인 1867년에 ‘유니버설’ 문고를 내놓으면서 판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첫 책은 괴테의『파우스트』였다. 맥주 한잔의 저렴한 값에 어느 주머니에 넣어도 휴대가 간편한 작은 책이 독일 문화와 지성계의 정수를 소화해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같은 대륙의 다른 나라는 어떨까. 영국의 ‘펭귄북스’를 빼놓을 수 없다. 1935년 7월 애거서 크리스티의『스타일즈 저택의 죽음』, 헤밍웨이의『무기여 잘 있거라』 등 10권의 1차분 문고본을 선보였다. 펭귄북스의 탄생에는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진다. 1934년 어느 날, 출판사 편집장이던 앨런 레인이 인기 추리소설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를 만나고 막 런던으로 돌아가던 참이었다. 기차를 기다리던 그는 기차 안에서 읽을 만한 책을 찾아 가판대를 살펴보다가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가판대에 잡지와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순간 그의 뇌를 번뜩 스치고 지나가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기차 안에서 누구나 손쉽게 사볼 수 있는 양질의 책을 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펭귄북스는 출간 1년 만에 300만 부가 팔려나가며 ‘독서 대중화의 시대’를 열었다. 펭귄북스의 가격은 권당 6펜스. 당시 담배 한 갑 가격이었다. 일반 서점뿐 아니라 기차역, 담뱃가게에서도 펭귄북스 시리즈를 살 수 있었다. 1946년부터는 호머의 『오디세이』 등 고전을 엄선한 ‘펭귄 클래식’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지식 공화국’ 크세즈문고

독일과 영국의 문고본 출판보다 조금 뒤늦었지만 프랑스의 ‘크세즈’도 빠뜨릴 수 없다. 레클람문고나 펭귄북스가 상업 출판사에서 자라났다면, ‘크세즈’는 대학출판부에서 솟구쳤다. PFU(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는 알려져 있듯 1921년 철학, 역사, 문학 분야로부터 출판을 시작한 대학출판 명가다. ‘크세즈’는 1941년 폴 앙굴방이 기획을 시작했다. 제1호로 나온『생물학의 역사』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크세즈’는 철학, 종교, 문학, 인류학, 교육학, 법학, 경제, 의학, 역사, 예술, 환경, 국제관계, 스포츠 등에서부터 새로운 지적 모험 영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독서층을 겨냥하고 있다.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주제들을 망라하고 있다. 『20세기의 세계인구』,『유아 정신병리학의 현대사』, 퇴직 이후의 삶의 설계』를 이미 20여년 전에 내놓아 독자들의 기대에 앞서 부응하고 있다. 크세즈(Que sais-je)는 몽테뉴가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다. 박치완 한국외대 교수(프랑스철학)은 이런 ‘크세즈’를 가리켜 “크세즈는 명실상부한 ‘지식의 백과사전’ 내지 ‘지식 공화국’의 면모를 갖췄다고 평가받을 수 있다. 프랑스 지성계와 프랑스인들의 지적 수준이 이 ‘크세즈’ 총서로 대변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라고 일찍이 평했다.


‘또 하나의 문부성’ 이와나미문고

일본 문고본의 역사도 만만찮다. 이와나미(岩波)서점이 대표적이다. 1913년에 이와나미 시게오가 도쿄 진보초(神保町)에 연 고서점에서 출발했다. 일본 출판시장에서 차지하는 매출 규모는 10위권 정도지만, 그 영향력은 훨씬 크다. 이와나미 시게오가 ‘이와나미문고’를 시작하면서 썼던 「문고의 사명」 같은 글은 지금 읽어도 뭉클한 구석이 있을 정도다.
“이와나미문고는 고금동서의 고전을 보급시키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 고전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고전이 얼마만큼 대중에 보급되는가가 문화의 수준을 드러내는 척도다. 그러니 문고로 출판할 때는 ‘경건한 자세를 가지고, 고전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미흡하나마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고자 마음먹고, 일반 단행본보다도 훨씬 엄숙한 마음가짐으로 문고출판에 임했다.”
이와나미의 계승자들은 “사람들이 꼭 읽어야 할 책들을 내는 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 이런 언명에서 알 수 있듯, 이와나미문고의 베스트셀러는 역시 고전과 현대 자본주의사회 비판 쪽 책들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에밀』, 『논어』, 『공산당 선언』 등이 누적 판매도서 상위권에 드는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출판평론가인 표정훈은 이런 이와나미문고를 가리켜 “‘이와나미 문화’, ‘또 하나의 문부성’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와나미는 비판적 의제 설정, 새로운 지식 담론의 생산과 보급, 그리고 전문적인 학술 성과와 시민적 교양의 매개에 충실해왔다”고 평가한다.
이와나미문고는 표지 색이 청색, 황색 녹색, 백색, 적색 등 다섯 가지로 나누어진다. 백색은 법률, 정치, 경제 등 사회과학 쪽에, 황색과 녹색은 각각 에도 시대까지의 일본 고전문학, 일본 근현대문학에 부여된다. 적색은 외국문학으로, 하위분류로 동양문학, 그리스·라틴문학, 영국문학, 미국문학, 독일문학, 프랑스문학, 러시아문학, 남북 유럽문학 등을 포괄한다. 청색은 일본사상, 동양사상, 불교, 역사·지리, 음악·미술, 철학, 교육, 종교, 자연과학 등을 포함한다. 색깔로 지식의 스펙트럼을 나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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