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문고본을 읽으며 성장한 세대만이 갖고 있는 향수이기도 하다. 사진 속 문고본 책들 뒤편의 어두운 그림자들처럼, 그것은 책을 따라 존재하는 추억이다.
용돈 받기 무섭게 동네 서점으로 달려간다. 그곳에는 ‘삼중당문고’가 있었다. 출판사 측에서 별도 제작한 타워형 회전식 서가에 꽂힌 문고본들. 서가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책을 살핀다. 생각 같아서는 10권 정도 뽑아들고 싶지만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지 않는다. 아쉽지만 두 권만 뽑아서 계산대로 가져간다. 『보들레르 시선』과 『여자의 일생』. 1980년대 초반 중학생이었던 나의 모습이다.
전혜린을 처음 접한 것도 삼중당문고로 나온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75)를 통해서였다. 학교 라운지에서 그 책을 읽고 있었는데 같은 학과 여학생 친구가 빌려달라고 해서 빌려줬다. 빌린 책은 돌려받기 어렵다는 게 정설이다. 1년 넘도록 돌려받지 못했다. 뭐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빌려 간 친구가 보라색 색지로 표지를 곱게 싸서 돌려주었다. ‘늦게 돌려줘서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라는 예쁜 글씨가 속표지에 적혀 있었다.
문고본 뒤에는 지금까지 나온 책들 목록이 있었다. 그 목록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지적(知的) 충만감 같은 걸 느끼기 충분했다. ‘다음 번엔 이 책을 사리라’ 마음먹으며 볼펜으로 목록에 별표를 해두기도 하였다. 그렇게 별표를 한 책을 산 뒤에는 다시 그 책 뒤에 실린 목록을 살피고 또 별표를 한다. 문고본 목록은 그 자체로 지식의 좌표이자 독서 가이드 구실을 해주었다. 작가 장정일이 시 「삼중당 문고」(『길안에서의 택시잡기』, 민음사, 1988)에서 말한다. “간행목록표에 붉은 연필로 읽은 것과 읽지 않은 것을 표시했던 삼중당 문고.”
‘삼중당문고’로 문학수업한 작가
장정일(1962년생)은 중학교 때 껌 포장지를 모았다. 쥬시후레쉬·스피아민트·아카시아·샤넬 등등 약 스무 종을 모아놓고 새 상품이 나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는데, 어머니는 친척들만 모이면 ‘얘는 껌 종이 모아’라고 말하곤 했다. 장정일은 “그런 박해를 당한 끝에 삼중당문고로 갈아탔다.” 중학 시절 삼중당문고 200여 권을 독파한 것이 장정일의 독학 문학수업이었다.
시인 안도현(1961년생)은 “고교 입학을 앞두고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가지런히 꽂힌 삼중당 문고를 접하면서 독서에 빠졌고 고교 진학 후 문예반 활동을 시작하여 작가의 꿈을 키웠다.” 배우 김응수(1961년생)는 “300∼500원 하던 삼중당문고를 10권씩 끼고 살면서 소설가를 지망하기 시작했고 갈수록 연극과 영화로 마음이 기울어져갔다.”
저술가 유시민(1959년생)은 “고3때 책장에서 우연히 빼든 삼중당문고판 『죄와 벌』이 하도 재미있어서 밤새 다 읽었던 것이 책을 통해 사회문제와 삶의 문제를 인식한 첫 경험이었다.” 시인 김갑수(1959년생)의 청소년 시절 “열정을 휩쓸어간 것은 다양한 문고본들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압권은 1975년부터 나오기 시작한 삼중당문고였다. 그 싸고 두껍고 작은 책의 깨알 같은 글씨를 어떻게 읽었는지.”
문화평론가 정윤수(1966년생)는 고등학교 시절 “왕복 버스비로 헌책방에 일동 기립하고 있는 삼중당문고 한 권을 살 수 있었기 때문에 버스를 타지 않고 걷고 또 걸었다.” 과학저술가 이정모(1963년생)는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넘어가는 겨울방학부터 책방 출입을 시작했는데 일주일에 한 번 24킬로미터 떨어진 서점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가서 살 수 있던 책은 삼중당문고가 전부였다.” 대략 1950년대 말~1960년대 중후반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삼중당문고는 집단적 기억이자 세대 체험이다.
나의 문고본 추억은 삼성문화문고와도 닿아있다. 내가 산 것은 아니었고 외삼촌이 갖고 있던 삼성문화문고 10여 권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 삼성문화문고는 타이틀 구색에서 고전 사상명저와 학술서 비중이 높은 편이었다. 내가 갖고 있는 책으로 예컨대 하인리히 리케르트의 『문화과학과 자연과학』, 황종희의 『명이대방록』 등이 있다.
이른바 ‘삼성문화문고 사태’라는 것도 있었다. 비영리재단법인 삼성문화재단(현 삼성재단)이 (1977년 삼성미술문화재단으로 명칭 변경) 1971년 12월 삼성문화문고 제1권 『독일 국민에게 고함』을 내놓자 출판계가 반발했다. 재벌 대기업이 영세한 출판계를 위협한다는 것. 문공부가 중재에 나서 삼성문화문고는 비상업적 출판에만 전념한다는 데 합의했다. 삼성문화문고가 학술서와 고전 사상명저 비중이 높아진 하나의 원인이다. 1974년 제 50권 『세계 회화의 역사』가 발간됐고, 1977년 제 100권 발간 기념으로 별도 서가를 제작, 배포했다.
호암 이병철 회장이 워낙 책을 좋아하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호암은 연말연시를 도쿄 대형서점에서 책을 골라 사는 것으로 보내곤 했다. 수행 비서들은 그가 고른 다량의 책을 운반하느라 땀 좀 흘려야 했다. 교보 신용호 회장이 광화문 교보 지하에 대형 서점을 설립하려 하자 호암은 이를 적극 격려하며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호암을 칭송하려는 게 아니다. 어쩌면 삼성이 우리 문화계에 기여한 가장 큰 일이 삼성문화문고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다양하고 방대한 지(知)의 세계
박영문고와 서문문고도 즐겨 사곤 했다. 주로 종로서적이나 교보문고를 갔다. 박영문고로 나온 박준택의 『세계의 예지』(전 2권, 1977)를 애독했던 기억이 엊그제 같다. 동서고금 철학자, 사상가들의 삶과 사상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책이었다. 철학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처음으로 키워준 책이기도 했다.
서문문고에서는 열암 박종홍의 『한국사상사』(1972)가 기억에 남는다. 1960년대에 학술지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 펴낸 책으로 ‘불교사상편’이다. 서문문고는 별 표시가 찍혀 있었는데 가격 표시였다. 별 하나에 70원, 그러니까 별 다섯 개가 찍힌 『한국사상사』는 350원이다. 어느 문고본이든 일반 단행본 가격에 비해 저렴했기 때문에 문고본을 고르는 데 가격이 영향을 미친 적은 없었다.
문고본은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을까? 무엇보다도 값이 쌌다. 요즘말로 가성비가 좋았던 것. 형편이 넉넉지 않은 사람이라도, 쥐꼬리 용돈 받는 처지인 학생이라도 큰 부담 없이 문고본을 살 수 있었다. 문고본은 타이틀 구색이 다양하고 방대했다. 문학, 역사, 철학, 사회과학, 에세이 등등 동서고금의 전 분야를 망라했다. 이 점은 책 선택의 어려움을 덜어주기도 했다. 문고본의 타이틀 구색을 따라가면 지식의 종합성, 전체성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문고는 지식정보의 대량 염가 공급원이었다.
광복 직후와 1950년대, 1960년대에도 많은 문고본들이 속속 선보였다. 1947년에 나온 정음문고, 1948년에 시작된 을유문고가 대표적이었지만 문고 전성기는 1970년대다. 1976년 당시 30여 개 출판사들이 문고를 펴냈다. 그 해에 문고 신간 1천여 종이 나오며 판매량 250만 부를 넘었다. 서문문고(1972), 문예문고(1972), 현대과학신서(1973), 신구문고(1973), 박영문고(1960년 시작되어 중단됐다가 1974년 재개), 삼중당문고(1975), 열화당미술문고(1975), 범우에세이문고(1976) 등이 속속 선보였다.
문고의 위기는 전성기인 1976년에 찾아오고 있었다. 삼중당문고의 200원 정가에 자극받은 다른 문고들이 값을 내리면서 수익성이 악화됐다. 신간 출간 주기도 길어졌다. 1979년에 정음, 을유, 탐구, 박영, 문예, 서문문고 등이 정기 출간을 중단하기 시작했다. 박리다매 전략이다 보니 제작비가 올라도 책값을 크게 올릴 수 없었다. 200~300원 정가가 1970년대 말 600원대까지 올랐지만 제작비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1980년대 후반까지 명맥은 유지했지만 ‘종이책을 통한 지식의 염가 대량 보급’ 시대가 저물고 있었다. 문고본 시대는 점차 추억이 되어갔다.
[표정훈 출판평론가·작가] 서강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한양대 특임교수와 건국대,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를 역임했다. 『탐서주의자의 책』,『철학을 켜다』등을 썼고,『젠틀 매드니스』(공역), 『중국의 자유 전통』등을 번역했다.
전혜린을 처음 접한 것도 삼중당문고로 나온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75)를 통해서였다. 학교 라운지에서 그 책을 읽고 있었는데 같은 학과 여학생 친구가 빌려달라고 해서 빌려줬다. 빌린 책은 돌려받기 어렵다는 게 정설이다. 1년 넘도록 돌려받지 못했다. 뭐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빌려 간 친구가 보라색 색지로 표지를 곱게 싸서 돌려주었다. ‘늦게 돌려줘서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라는 예쁜 글씨가 속표지에 적혀 있었다.
문고본 뒤에는 지금까지 나온 책들 목록이 있었다. 그 목록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지적(知的) 충만감 같은 걸 느끼기 충분했다. ‘다음 번엔 이 책을 사리라’ 마음먹으며 볼펜으로 목록에 별표를 해두기도 하였다. 그렇게 별표를 한 책을 산 뒤에는 다시 그 책 뒤에 실린 목록을 살피고 또 별표를 한다. 문고본 목록은 그 자체로 지식의 좌표이자 독서 가이드 구실을 해주었다. 작가 장정일이 시 「삼중당 문고」(『길안에서의 택시잡기』, 민음사, 1988)에서 말한다. “간행목록표에 붉은 연필로 읽은 것과 읽지 않은 것을 표시했던 삼중당 문고.”
‘삼중당문고’로 문학수업한 작가
장정일(1962년생)은 중학교 때 껌 포장지를 모았다. 쥬시후레쉬·스피아민트·아카시아·샤넬 등등 약 스무 종을 모아놓고 새 상품이 나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는데, 어머니는 친척들만 모이면 ‘얘는 껌 종이 모아’라고 말하곤 했다. 장정일은 “그런 박해를 당한 끝에 삼중당문고로 갈아탔다.” 중학 시절 삼중당문고 200여 권을 독파한 것이 장정일의 독학 문학수업이었다.
시인 안도현(1961년생)은 “고교 입학을 앞두고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가지런히 꽂힌 삼중당 문고를 접하면서 독서에 빠졌고 고교 진학 후 문예반 활동을 시작하여 작가의 꿈을 키웠다.” 배우 김응수(1961년생)는 “300∼500원 하던 삼중당문고를 10권씩 끼고 살면서 소설가를 지망하기 시작했고 갈수록 연극과 영화로 마음이 기울어져갔다.”
저술가 유시민(1959년생)은 “고3때 책장에서 우연히 빼든 삼중당문고판 『죄와 벌』이 하도 재미있어서 밤새 다 읽었던 것이 책을 통해 사회문제와 삶의 문제를 인식한 첫 경험이었다.” 시인 김갑수(1959년생)의 청소년 시절 “열정을 휩쓸어간 것은 다양한 문고본들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압권은 1975년부터 나오기 시작한 삼중당문고였다. 그 싸고 두껍고 작은 책의 깨알 같은 글씨를 어떻게 읽었는지.”
문화평론가 정윤수(1966년생)는 고등학교 시절 “왕복 버스비로 헌책방에 일동 기립하고 있는 삼중당문고 한 권을 살 수 있었기 때문에 버스를 타지 않고 걷고 또 걸었다.” 과학저술가 이정모(1963년생)는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넘어가는 겨울방학부터 책방 출입을 시작했는데 일주일에 한 번 24킬로미터 떨어진 서점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가서 살 수 있던 책은 삼중당문고가 전부였다.” 대략 1950년대 말~1960년대 중후반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삼중당문고는 집단적 기억이자 세대 체험이다.
나의 문고본 추억은 삼성문화문고와도 닿아있다. 내가 산 것은 아니었고 외삼촌이 갖고 있던 삼성문화문고 10여 권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 삼성문화문고는 타이틀 구색에서 고전 사상명저와 학술서 비중이 높은 편이었다. 내가 갖고 있는 책으로 예컨대 하인리히 리케르트의 『문화과학과 자연과학』, 황종희의 『명이대방록』 등이 있다.
이른바 ‘삼성문화문고 사태’라는 것도 있었다. 비영리재단법인 삼성문화재단(현 삼성재단)이 (1977년 삼성미술문화재단으로 명칭 변경) 1971년 12월 삼성문화문고 제1권 『독일 국민에게 고함』을 내놓자 출판계가 반발했다. 재벌 대기업이 영세한 출판계를 위협한다는 것. 문공부가 중재에 나서 삼성문화문고는 비상업적 출판에만 전념한다는 데 합의했다. 삼성문화문고가 학술서와 고전 사상명저 비중이 높아진 하나의 원인이다. 1974년 제 50권 『세계 회화의 역사』가 발간됐고, 1977년 제 100권 발간 기념으로 별도 서가를 제작, 배포했다.
호암 이병철 회장이 워낙 책을 좋아하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호암은 연말연시를 도쿄 대형서점에서 책을 골라 사는 것으로 보내곤 했다. 수행 비서들은 그가 고른 다량의 책을 운반하느라 땀 좀 흘려야 했다. 교보 신용호 회장이 광화문 교보 지하에 대형 서점을 설립하려 하자 호암은 이를 적극 격려하며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호암을 칭송하려는 게 아니다. 어쩌면 삼성이 우리 문화계에 기여한 가장 큰 일이 삼성문화문고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다양하고 방대한 지(知)의 세계
박영문고와 서문문고도 즐겨 사곤 했다. 주로 종로서적이나 교보문고를 갔다. 박영문고로 나온 박준택의 『세계의 예지』(전 2권, 1977)를 애독했던 기억이 엊그제 같다. 동서고금 철학자, 사상가들의 삶과 사상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책이었다. 철학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처음으로 키워준 책이기도 했다.
서문문고에서는 열암 박종홍의 『한국사상사』(1972)가 기억에 남는다. 1960년대에 학술지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 펴낸 책으로 ‘불교사상편’이다. 서문문고는 별 표시가 찍혀 있었는데 가격 표시였다. 별 하나에 70원, 그러니까 별 다섯 개가 찍힌 『한국사상사』는 350원이다. 어느 문고본이든 일반 단행본 가격에 비해 저렴했기 때문에 문고본을 고르는 데 가격이 영향을 미친 적은 없었다.
문고본은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을까? 무엇보다도 값이 쌌다. 요즘말로 가성비가 좋았던 것. 형편이 넉넉지 않은 사람이라도, 쥐꼬리 용돈 받는 처지인 학생이라도 큰 부담 없이 문고본을 살 수 있었다. 문고본은 타이틀 구색이 다양하고 방대했다. 문학, 역사, 철학, 사회과학, 에세이 등등 동서고금의 전 분야를 망라했다. 이 점은 책 선택의 어려움을 덜어주기도 했다. 문고본의 타이틀 구색을 따라가면 지식의 종합성, 전체성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문고는 지식정보의 대량 염가 공급원이었다.
광복 직후와 1950년대, 1960년대에도 많은 문고본들이 속속 선보였다. 1947년에 나온 정음문고, 1948년에 시작된 을유문고가 대표적이었지만 문고 전성기는 1970년대다. 1976년 당시 30여 개 출판사들이 문고를 펴냈다. 그 해에 문고 신간 1천여 종이 나오며 판매량 250만 부를 넘었다. 서문문고(1972), 문예문고(1972), 현대과학신서(1973), 신구문고(1973), 박영문고(1960년 시작되어 중단됐다가 1974년 재개), 삼중당문고(1975), 열화당미술문고(1975), 범우에세이문고(1976) 등이 속속 선보였다.
문고의 위기는 전성기인 1976년에 찾아오고 있었다. 삼중당문고의 200원 정가에 자극받은 다른 문고들이 값을 내리면서 수익성이 악화됐다. 신간 출간 주기도 길어졌다. 1979년에 정음, 을유, 탐구, 박영, 문예, 서문문고 등이 정기 출간을 중단하기 시작했다. 박리다매 전략이다 보니 제작비가 올라도 책값을 크게 올릴 수 없었다. 200~300원 정가가 1970년대 말 600원대까지 올랐지만 제작비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1980년대 후반까지 명맥은 유지했지만 ‘종이책을 통한 지식의 염가 대량 보급’ 시대가 저물고 있었다. 문고본 시대는 점차 추억이 되어갔다.
[표정훈 출판평론가·작가] 서강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한양대 특임교수와 건국대,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를 역임했다. 『탐서주의자의 책』,『철학을 켜다』등을 썼고,『젠틀 매드니스』(공역), 『중국의 자유 전통』등을 번역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