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문화적 인간

한국인을 설명하는 키워드에는 뭐가 있을까요?
먼저 ‘한국인’이 누구인지라는 질문이 선행돼야죠. 모국어를 한국어로 쓰는 사람, 대한민국 여권 소지자, 한국계 혈통을 가진 사람 등 많은 규정이 있을 수 있겠죠. 하지만 어떤 규정도 학문적으로 믿고 쓰기에는 지나치게 허술해요. 고려인 4세, 재미교포 1세대, 재일조선인, 평양시민, 새터민, 조선족, 서울시민 등을 두루 아우르는 합의된 개념이 없고, 있을 수도 없다고 봐요. 한국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엄밀하게 말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에요. 재일조선인처럼 어느 나라의 여권도 없고, 모국어와 모어가 일치하지 않는 ‘한국인’도 있어요. 이런 점들을 무시하고 한국인에 대한 좁은 규정을 내리는 순간, 그것은 차별과 폭력으로 반드시 이어지게 돼 있어요.

 

차별과 폭력이요?
우리 현대사에는 ‘제대로 된 한국인이라면 이래야지’라는 망상에 사로잡힌 권력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의 이념을 숭배하지 않으면 ‘빨갱이’가 되거나, 제주나 호남처럼 권력자들에게 밉보인 지역은 내부 식민지 취급을 받았죠. 그렇게 비(非)한국인을 양산해온 방식은, 황국신민으로서의 본분을 잊은 사람을 非국민으로 낙인찍었던 일본 제국의 논리와 구조가 같지 않나요? ‘한국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조심성이 많이 필요한 일입니다.

 

‘한국문화’도 다시 생각해봐야겠군요
그렇죠. 우리가 즐기는 음악, 영화, 패션, 공산품 이런 것들이 얼마나 한국적일까요? 취리히나 오사카 사람들도 우리가 보는 영화, 우리가 듣는 음악을 즐기고, 비슷한 신발을 신고, 비슷한 노트북을 들고 다녀요. 우리가 만든 것을 그들이 즐기고, 그들이 만든 것을 우리도 즐깁니다. 이제 문화를 국경에 가둘 수 있는 시대는 지났어요. 전 지구적인 문화, 인류의 문화라는 관점에서 말해야 할 시대가 된 지 오래에요. 정치, 경제 등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좌우하는 문제들에 국경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좋아질 수 있는 부분도 있다고 봐요. 노동, 환경, 인권 등 인류의 당면 과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인류 공동의 문화를 일굴 수 있는 좋은 시기거든요.

 

한국인의 ‘음주가무 DNA’는요?
그런 게 어디 있나요? 잘 마시는 사람, 잘 노는 사람들은 세계 어디에나 있어요. 유학 시절에 보니 이탈리아 친구들이 참 잘 마시고 잘 놀더군요. 북독일 친구들은 잘 노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지간히 마시긴 하고요. 브라질 친구들은 그 북독일 친구들까지 춤을 추게 할 정도로 잘 놀아요. 중요한 건 이 사람들에게 음주가무는 여가의 여러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라는 거예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여가가 있으면 다행이고, 그나마 있는 여가도 높은 확률로 음주가무로 수렴되는데요, 이건 문제가 많다고 봐요. 어릴 때부터 다양한 문화적 여가를 즐기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그런 기회가 없었거든요. 당장 부모들이 가만있지 않잖아요, 그런 ‘쓸 데 없는 것’ 할 시간에 영어 수학을 하라고 닦달해왔으니까요.

 

『조선왕조실록』,『팔만대장경』등 기록유산을 보면, 문자를 중시하는 문화였어요
문자를 천시하는 문화라는 게 있을 수 없겠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이게 지나쳐서 문제였다고 봅니다. 기록을 하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죠. 하지만 소수가 독점하는 문해의 능력이 권력으로 직결되는 사회는 폐쇄적이고 억압적일 수밖에 없거든요.

 

기록을 중시하지만, 정작 한국인의 독서량은 OECD 국가 중 꼴찌 수준입니다
독서란 그 무엇보다도 능동적인 정신의 작용이고, 어떤 목적과도 무관하게 앎 그 자체를 원하는 인간 몸부림의 결정체에요.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첫머리에서 “모든 인간은 본능적으로 앎을 원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문화라는 말은 원래 개간, 경작을 뜻합니다.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는 일이죠. 이게 인간 정신에 적용될 때, 가장 대표적인 문화 행위가 되는 것이 독서에요. 이를 통해 인간은 알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키고, 정신을 비옥하게 가꿔갑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어떤가요? 대부분은 크고 작은 시험을 준비하며 울며 겨자 먹기로 책을 체험하고 그 이후로는 가까이하지 않아요. 게다가, 우리는 오랫동안 국가가 정해주는 지침을 ‘정답’으로 내재화하고 살아야만 했어요. 시험을 위한 수단으로 책을 붙잡고 있자니 도저히 재미가 생기지 않고, 정답을 남들이 정해주니 독서를 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이런 척박한 환경 속에서는 독서라는 행위가 일어날 수 없어요. 독서는 남이 정해준 ‘정답’ 암기와도, ‘시험 준비’와도 양립할 수 없습니다. 순수한 호기심의 발로에서 비롯되는 것이 독서이고, 그것만을 공부라고 부를 수 있어요.

 

한국 역사에는 수백 년을 잇는 왕조가 많습니다. 이것이 한국인의 아비투스 형성에 끼친 영항이 있을까요?
흥미로운 현상인 건 맞아요. 하지만 그 장수 왕조들이 현대 한국인의 아비투스 형성에 무슨 영향을 미쳤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죠. 아비투스라는 것이 장기간 축적된 문화인데, 우리에게 그런 것이 있던가요? 물론 있긴 했겠죠.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지나며 꽤 많은 부분이 소멸했고, 어렵사리 살아남은 전통문화라는 것도 새마을 운동 때 시멘트 벽과 슬레이트 지붕 아래 모조리 박멸당하고 말았습니다. 아비투스는 공동체적일 수밖에 없는데, 새마을운동은 공동체 문화에 사망선고를 내렸어요. 강약의 차이가 있을 뿐, 문화대혁명과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봐요. 강제적으로 단절된 아비투스가 복원될 리는 없겠죠. 좋은 방향으로 씨앗부터 새로 뿌려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전쟁 직후 세계 최빈국이었던 한국은 70년 만에 세계 10위 규모의 경제 수준을 이룩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사례인데요. 이 역시 한국인 특유의 기질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헝그리 정신’ 같은 이야기들을 하는데, 관련이 아주 없지는 않겠죠. 하지만 구성원의 기질로 한 국가의 경제발전을 설명하기는 어려워요. 독종, 오기라면 져 본 적이 없는 베트남을 볼까요? 프랑스, 미국, 중국과 전쟁해서 모조리 이긴 나라에요. 그러나 경제는 세계 40위권 정도에 불과하죠. 일본은 근면, 단합으로 정평이 나 있지만 30년째 장기 불황 아닌가요? 경제발전에는 아마도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한 요인들이 작용할 겁니다. 문제는 우리가 세계 10위권의 그럴싸한 경제 규모를 갖췄음에도 여전히 먹고 살 걱정, 집 걱정, 노후 걱정에 강박적으로 시달리고 있는 현상을 규명하는 일이 아닐까요? 1차적인 고민을 붙들고 있다는 점에서는 최빈국 시절이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봅니다. 우리는 예전보다 결코 더 잘살고 있는 게 아니에요.

 

분단국가인 한국은 비행기 없이는 세계를 만나기 어려운 ‘섬’ 같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시절만 해도 ‘경성-모스크바’ 기차 승차권이 있었어요. 하지만 분단 후 우리는 지금까지 육상국경이 없는 ‘섬’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타자와의 접촉이 물리적으로 차단된 곳에서는 권력자의 통제도 그만큼 수월해지죠. 그리고 그런 통제를 통해 길들여진 사람들은 타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행사하는 악순환 속에 놓이게 됩니다. 이제는 그런 과거와 결별하고, 좀 더 포용적인 문화와 정체성을 고민할 시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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