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적 복수의 횡행은
현재와 같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공적 세계의 역할과
책무가 어떻게 무너져
내렸는지를 징후적으로
드러내준다.
최근 한국 드라마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다양한 플랫폼의 대두에 매체와 장르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TV드라마 장르들도 좀비물, 공포물로까지 확장되며 국내외 시청층을 넓혀가고 있다. 장르뿐 아니라 서사도 다양해지고 영상 기술 수준도 놀랍다. 그런데 이렇게 위세를 떨치는 K-드라마의 한가운데 ‘복수극’ 현상이 있다.
복수극의 범람은 2000년 이후 한국 TV드라마에 나타난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로, 2002년 임성한 작가의 「인어아가씨」와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복수 3부작 중 첫 작품)의 동시기 출격으로 가시화됐다. 이후 드라마, 영화, 웹툰 가리지 않고 복수극들이 줄기차게 등장했는데, 「아내의 유혹」 같이 막장드라마 논란을 일으키기도 하고 「부활」이나 「추적자」처럼 웰메이드 드라마로 찬사를 받기도 했다. 최근만 해도 흥행과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빈센조」, 「모범택시」, 「괴물」, 그리고 「펜트하우스」 등이 모두 복수극들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항시적으로 존재했던 복수극이라는 형태가 21세기에 왜 이토록 성행하는 것일까? 현 시기 복수극들은 어떤 특성들을 나타내며, 그 사회문화적 의미는 무엇일까? 전 세계적인 자본주의의 위기와 신자유주의 질서 속에서 복수극의 유행이 단지 한국의 상황만은 아니지만, 특히 한국 사회에서 복수극들이 유래 없는 강세를 보이는 것은 외환사태 이후 지속되는 경제 위기와 생존 투쟁의 격화라는 배경을 빼놓고는 논할 수 없을 것이다. 가속적인 양극화 속에서 무한 경쟁, 승자독식이 지배적인 사회 룰이 된 상황은 복수극의 감정과 논리를 뒷받침한다. 즉 분노와 피해의식이라는 감정, 등가원리라는 논리가 복수극의 내용과 형식을 채워준다.
분노와 피해의식의 등가원리
우선 복수극들을 가득 채우는 분노와 피해의식은 현 사회가 뭔가 잘못됐다는, 부조리하고 불합리하고 불공평하다는 공통의 인지와 감각의 감정적·심리적 형태들이다. 사악한 범법자들, 특히 돈 있고, 힘 있는, 가진 자들의 횡포와 비행은 사람들의 분노를 자극하고, 불평과 불만을 불러일으킨다. 악당들의 만행에 우리가 그토록 분노하는 것은 우리가 남다른 정의감에 불타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정확히 우리의 피해의식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은 다양한 방식과 수위로 억압과 종속을 견뎌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갖게 되는, 당하고 살아왔다는, 자신이 항상 피해자라는 심리다. 나의 실패, 불운과 불행은 모두 썩어빠진 사회 탓이며, 부정한 가부장, 탐욕스러운 기득권층, 부패한 지배세력들 때문이다. 혹은 호시탐탐 내 자리를 노리거나 내 정체를 위협하는 경쟁자들, 위험한 타자들(목소리를 높이는 여성들, 성소수자들, 외국인 노동자들, 난민들 등등)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분노와 불만, 불안과 공포를 투사할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복수극은 불행한 현 사태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가해자 악당을 우리 눈앞에 가져다준다.
그러나 악당을 무찌르고 사회를 바로잡는 것은 이제 사회 정의를 위해 투신하는 위대한 영웅들이 아니다. 피해자들 자신이 당한 만큼 갚기 위해 직접 복수에 나선다. 여기서 복수극의 근본적인 극적 논리이자 심적 경제가 받은 만큼 돌려주고 당한 만큼 되갚아주는 등가교환체계에 기반해 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자본주의 경제의 등가원리는 마침내 대중문화의 감정적·심리적 중심 영역에 안착했다. 이 등가원리는 그것이 공평하고 공정한 것이라는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부정의하고 불공평한 사회에 맞서는 공평무사하고 공명정대한 등가교환인 셈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등가교환의 모순은 그것이 등가이나 등가가 아니라는(잉여가치, 이윤, 이문이 남는) 것이며, 복수의 동해보복 역시 항상 넘치거나 모자라거나 결코 등가에 이르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부르고, 대리되고, 전염되고, 모방되면서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러한 복수극의 등가원리라는 내적 모순은 자본주의 폐해를 자본주의 논리로 극복하고자 하는 근본적 곤경과 다르지 않다.
개인과 사회구조적 악과의 싸움
무엇보다 복수극들은 공적 처벌이 아닌 사적 복수를 행하는데, 이러한 사적 복수의 횡행은 현재와 같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공적 세계의 역할과 책무가 어떻게 무너져 내렸는가를 징후적으로 드러내준다. 사적 복수 대행극을 표방하는 「모범택시」 2회에서 장성철(김의성 분)은 주인공 김도기(이제훈 분)에게 함께 복수에 나설 것을 추동하며 말한다. “김도기씨 어머니가 왜 돌아가셨는 줄 압니까? 미치광이 살인자 때문에? 아닙니다. 값싼 용서로 그런 괴물을 키운 이 사회 탓입니다. 아직도 경찰, 검찰, 판사들의 정의를 믿습니까?”
이 복수극들에선 이미 공적 권력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본과 권력이 막강한 카르텔을 형성해 오히려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약탈하고 심지어 도륙한다. 상해, 살인, 방화 같은 사건들도 수시로 벌어진다. 불법과 비리, 부패와 협잡으로 돌아가는 지배 시스템, 이것은 단지 타락한 몇몇 개인들의 죄악이 아니라 점점 구제불가하게 망가진 사회구조적 악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복수는 부패한 사회 체제, 공적 질서에 개인이 맞서 싸우는 사적 복수의 형태가 될 수밖에 없다. 복수는 피해자 개인의 몫이며, 모든 책임은 개인에게 돌려진다.
이는 형사수사물이나 범죄스릴러 등 기존 장르물들의 복수극화에서 잘 나타난다. 형사, 검사, 변호사 등 공적 책무를 지녔던 기존 장르의 주인공들은 이제 자신들의 개인적 원한에 기반해서만 복수를 펼친다. 개인적 원한을 갖지 않는 주인공들이 순수하고 명예롭게 사회 정의를 위해 싸우는 일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자신의 이해관계와 무관한 정의나 공평은 존재하지 않는다. 「빈센조」의 마피아 변호사 빈센조(송중기 분)가 마피아보다 더 마피아 같은 초법적 범죄 집단인 대기업과 로펌, 검찰조직들의 거대 카르텔과 맞서 싸우는 것은 숨겨진 금괴 15톤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며, 장회장(옥택연 분)을 처절하게 고문해 죽이는 것도 무엇보다 자신의 엄마의 억울한 옥살이와 죽음에 대한 개인적 원한에 찬 복수다. 「괴물」에서 파출소 경사인 이동식(신하균 분)이 핏발 선 눈으로 연쇄살인범을 쫓는 것은 자신의 누이의 실종과 죽음 때문이지, 그의 직업이 경찰이어서가 아니다. 물론 여기서도 범인은 싸이코패스 연쇄살인마로 끝나지 않는, 지역 개발업자와 정치인과 경찰들이 모두 연루돼 있다.
선악 구별의 모호함과 악의 미학화 현상
흥미롭게도 가족멜로 안에서 치정과 불륜, 이권 다툼으로 발생한 복수극도 몸집을 키워가면서 점점 사회구조적 차원의 악행들을 겨냥하고 있다. 시즌 3까지 이어지고 있는 「펜트하우스」의 경우는 「아내의 유혹」식 가족복수극을 넘어 상류층 사회의 비도덕적·탈법적 커넥션을 그려 보인다. 「밀회」나 「스카이 캐슬」의 상류층 민낯 해부를 이어받은 듯 보이는 이 드라마는 인간들의 지독하고 끈질긴 상승 욕망에 따른, 대를 이은 경쟁과 승부 다툼으로 다수의 인물들이 얽히고설킨 복수의 연쇄를 지속해 나간다. 여기서 출세와 치부를 향해 극한으로 치닫는 자본주의적 상승 욕망은 단지 천서진(김소연 분)이나 주단태(엄기준 분) 같은 악당들만의 것이 아니다. 오윤희(유진 분)도 심수련(이지아 분)도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 기꺼이 말려들고 악당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복수를 벌인다. 가난하고 착한 주인공들도 이제 더는 짓밟히고 빼앗기지 않는다. 멜로드라마의 선과 미덕, 무구는 더 이상 도덕적 우세를 점하기 어렵게 됐다.
이처럼 복수극들의 인기로 나타난 하나의 주요한 결과가 바로 선악의 구별이 더욱 모호해졌다는 것이다. 못 가진 자와 가진 자의 대립, 주인공과 적대자의 갈등과 대결은 격화됐으나 물고물리는 복수의 과정에서 선과 악은 뒤집히고 요동치면서 서로 구별할 수 없이 뒤엉키게 됐다. 시청자는 「괴물」의 주인공 이동식이 범인인지 아닌지 초반 몇 회 동안 계속 의심을 해야만 하며, 「빈센조」의 마지막에서 빈센조의 잔혹한 복수 방식에 뭔가 찜찜함을 느끼면서도 못내 그럴만하다고 고개를 끄덕거리고, 「펜트하우스」의 천서진에게도 순간순간 안쓰러운 연민의 눈빛을 보낸다. 점점 더 강력해지는 악의 세력에 맞서다 주인공들은 점점 악인들을 닮아가고, 우리는 선악이 공존하는 다크 히어로들의 매력에 빠져든다.
확실히 선악의 자유로운 변신에 능한 악은 선 그 자체보다 유리하다. 인물들은 내면적으로 풍부해지고 입체화된다. 이를 악의 미학화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추정된 선과 악이 비틀리고 뒤집히면서 모종의 쾌감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악인들을 물리치고 그들이 가진 것들을 망가뜨렸다는 쾌감이거나, 또는 언젠가 그들 같은 막강한 힘과 부를 가질 수도 있다는 상상적 쾌감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악의 미학화 현상은 지배 세력과 상류층이 거하는 부유하고 화려한 세계의 현시 속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다수를 거느리는 악인들은 그 자체 매혹과 선망의 대상으로 우뚝 선다.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닌 물신적 욕망의 기표들이 난무한다. 빼앗긴 것들을 되찾기 위해 벌이는 목숨 건 쟁투 속에 폭력의 스펙터클들이 가세해 쾌감과 카타르시스를 강화한다. 화면에 전시된 소비상품들이 물신화되듯 폭력도 그 자체로 정당화되고 물신화된다. 통쾌한 카타르시스 속에 악은 쉽게 처단되고 더 큰 악으로 곧 되돌아온다. 그렇게 복수극은 계속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