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복수의 두 얼굴

『메데이아』, 사랑이 분노로 변할 때
현대인들만 복수 드라마에 열광하는 것은 아니다. 고대 아테네 사람들도 그랬다. 고전학자인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는 그 이면에는 정의에 대한 갈망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조국을 버리고 선택했던 남편의 배신으로 분노에 휩싸여 광기를 드러내는 메데이아의 사랑에 주목한다. 사랑은 순식간에 섬뜩한 분노로 변했다. 안 교수는 “사랑도 정의로워야 한다”라고 말한다.
메데이아는 기원전 431년에 상연된 그리스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Euripides, 기원전 485~406)의 동명 작품의 주인공이다. 그녀는 아버지를 배반하고 오빠를 죽이면서까지 기지를 발휘해 이아손을 도왔다. 이아손과의 사랑에 눈이 멀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정열적인 여인 메데이아는 사랑을 배신한 이아손에게 복수하기 위해 신부인 공주와 그 아버지 크레온 왕을 죽이고, 결국은 자신의 자식들까지 죽인다. 사랑과 분노, 그리고 잔인성과 폭력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인물인 셈이다.

 


어느 날, 가난과 추방 생활에 지친 남편 이아손이 코린토스의 공주 크레우사와 새 결혼을 선언하면서 그녀의 사랑은 분노로 급변한다. 아이도 둘이나 낳고 그런 대로 행복하게 지냈지만, 모든 것은 끝나버렸다. 에우리피데스는 『메데이아』에서 곤경에 처한 그를 이렇게 묘사했다. “아아, 아버지! 아아, 조국이여! 수치가 밀려오네요. / 아아 이러자고, 오빠까지 죽이며 고향과 조국을 배신했단 말인가!”
사랑을 잃은 그녀는 어떤 복수를 결심했을까? 메데이아는 이제 복수에 모든 것을 건다. 그녀를 두려워한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은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에게 추방을 명령한다. 하루의 말미를 얻은 그녀는 결혼 선물로 독이 묻은 드레스와 머리띠를 아이들 편에 보내 왕과 공주를 잔인하게 살해한다. 그러나 복수의 진짜 절정은 다른 데 있다. 자신이 낳은 아이들까지도 죽여 버린 것이다. 이아손의 혈통을 끊어버리는 것이 메데이아에게는 가장 큰 복수였던 것이다. 안재원 교수는 “그녀는 자식들이 코린토스에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자기 손으로 죽이는 것이 낫다고 계산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해석. 안 교수는 메데이아의 사랑이 분노로 바뀐 데에는 더 큰 이유가 있다고 본다. 그는 그 이유를 “근본적으로 남편 이아손이 교환 정의(iustitia commutativa)의 규칙을 어겼다는 데에서 찾아야 한다”라고 지적한다. “사랑도 기본적으로 주고-받음이고, 따라서 오고-감(去來)의 공정성과 형평성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할 때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헌신한 메데이아에게 이아손이 돌려준 것은 배신뿐이었다.

『폭풍의 언덕』, 그 황량한 세상의 끝
에밀리 브론테의 유작 장편소설 『폭풍의 언덕』(1847)도 메데이아의 복수의 절정을 되풀이하고 있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와의 불멸의 사랑을 우울하면서도 아름답게 묘사한 작품이다.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가 뛰어나다는 평을 받지만, ‘복수’에 한해 이 작품을 읽으면 다른 측면을 엿볼 수 있다.
이번에는 사랑을 잃은 남자의 복수다. 히스클리프의 스스로를 파괴할 정도로 광적인 복수심은 폭풍우가 내리치는 밤의 세계와 흡사다. 사랑의 실패가 이 남자를 끝없는 복수심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집시 태생의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의 아버지 언쇼에게 구출돼 성장하면서, 캐서린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언쇼가 죽자 캐서린의 오빠인 힌들레에게 온갖 학대를 당하다 견디다 못해 집을 뛰쳐나간다. 3년 만에 돌아왔지만, 이미 캐서린은 다른 남자와 결혼한 상태였다. 복수심에 눈이 어두워진 히스클리프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행동한다. 힌들레는 물론, 자신이 사랑했던 캐서린, 캐서린의 남편의 여동생까지 괴롭힌다. 캐서린의 시누이와 결혼했지만, 학대는 계속됐다. 그의 복수는 결국 캐서린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이쯤되면 가슴 속 불덩이를 내려놓아야 하겠지만, 히스클리프는 멈추지 않는다. 캐서린이 죽으면서 낳은 딸 캐시까지 복수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히스클리프는 복수를 위해 자신의 인생까지 한낱 도구로 내던졌던 것이다. 복수는 이렇게 자기파괴적이며, 끝을 예측할 수 없다.
영문학 3대 비극으로 손꼽히는 『폭풍의 언덕』(민음사, 2009)을 번역했던 김종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에밀리 브론테는 이상화되지 않은 현실의 인간을 창조해, 선이냐 악이냐 판가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선악이 한데 어울려 몸부림치는 인간 실존의 심연을 강렬한 필치로 그려냈다”라고 평가했다. 선악이 뒤섞여 있는 인간 실존을 지독한 복수가 움틀 수밖에 없는 조건으로 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복수라는 주제는 고대 아테네 사람들이나, 19세기 영국 요크셔지방의 사람들이나, 오늘을 사는 현대인 모두가 가슴에 안고 있는 ‘불덩이’일지도 모르겠다. 복수는 그토록 사랑하는 관계에서조차 공정성과 형평성의 원리가 깨지는 순간 느닷없이 불쑥 튀어나와 모든 것을 싹 쓸어버리는 태풍으로, 뒤엉킨 선악의 인간 조건에서 배태되는 치명적인 자기파멸 행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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