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복수의 두 얼굴

레비나스(왼쪽)와 데리다

복수 드라마는 결국 현실의 문제를 환기한다. 법과 폭력, 정의가 그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레비나스와 데리다에게서 이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철학자 진태원에 따르면, 두 사상가 모두 법, 폭력, 정의에 관한 문제를 성찰했다.


레비나스의 관점에 따를 경우 현실적인 법질서나 정치 제도는 타인과의 관계를 충실히 구현한다고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법질서나 정치 제도는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반면, 타인과의 관계는 그러한 이익의 추구에 저항하고 넘어설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데리다 역시 법과 정의를 구별해야 하고, 법이 아니라 정의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법의 힘』에서 발터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 대한 독해를 통해 법은 본성상 폭력적인 것이며, 힘으로서의 법, 법의 힘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해체 불가능한 정의의 이념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법은 정의가 아니다. 법은 계산의 요소며, 법이 존재한다는 것은 정당하지만, 정의는 계산 불가능한 것이며, 정의는 우리가 계산 불가능한 것과 함께 계산할 것을 요구한다.” 이 인용문에 따르면 데리다는 법과 정의를 상당히 엄밀하게 구별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법보다 정의를 더 우월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또한 데리다는 “나는 어떤 지점까지는 정의의 개념을 레비나스의 정의 개념과 연결시키려고 시도해볼 것”이라고 말하면서 ‘타인과의 관계, 곧 정의’라는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의 문장을 인용한다.


이렇게 본다면 데리다와 레비나스 사이에는 상당한 친화성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처럼 데리다가 법과 정의의 문제에서 레비나스를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간 단순한 독법이다. 왜냐하면 데리다는 법과 정의를 구별하기는 하되 양자를 대립시키거나 분리하지는 않으며, 더욱이 법과 구별되는 정의를 그 자체로 추구하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법과 분리된 정의, 곧 법에서 고립돼 있는 정의는 오히려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계산 불가능한 정의, 선사하는 정의라는 이념은 그것 자체로 고립될 경우에는 항상 악이나 심지어 최악에 더 가까운 것이 되고 마는데, 왜냐하면 이는 항상 가장 도착적인 계산에 의해 재전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진태원, 「타자의 윤리학: 평등한 자유를 넘어서」(『문명이 낳은 철학 철학이 바꾼 역사 2』, 진태원·한정헌 공저, 길, 2015)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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