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현대 명저 106선 해제

『관촌수필』 첫 대목은 ‘장항선’ 열차를 타고 ‘고향’에 내려가는 1인칭 화자 ‘나’로부터 시작한다. 어린 ‘나’가 보고들은 해방과 전쟁의 연대기를 기본 축으로 하여, 일가의 몰락을 뒤로한 채 고향을 나섰다가 성인이 되어 돌아와 겪는 귀향 서사 여덟 편이 연작(1972~1976) 형태로 묶여 소설 『관촌수필』이 됐다. 그러나 오늘날 이문구 문학의 지평은 ‘장항선’으로 대표되는 지역성에 갇혀 있지 않다. 초중등 교과서에까지 두루 실리는 교육 정전(正典)으로서의 위상을 갖게 됐으며, 『관촌수필』이 그토록 애틋하게 묘사한 ‘갈머리’, 즉 ‘관촌(冠村)’은 충남 보령의 어느 지역을 뜻하는 장소이자 고유명사가 아니라 한국인의 고향과 고향의식을 환기하는 일반명사로 자리잡았다. 말과 언어 수행 방식을 소설 속에 구현함으로써 문학어를 확장시켰다는 점이야말로 이문구 문학의 성과가 아닐 수 없으며, 『관촌수필』을 다시 읽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잃어버린 ‘고향’의 연대기고향은 『관촌수필』을 가로지르는 열쇳말이다. 소설 전편을 휘감는 토포필리아(topophillia), 즉 고향 마을 ‘관촌’에 대한 공간애(空間愛)가 두드러진다. 『관촌수필』이 펼쳐낸 공간은 실제 그곳을 고향으로 둔 독자는 물론이거니와 오늘날의 독자라도 소설이 펼쳐놓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 자연사박물관을 보는 듯한 인정과 풍속의 묘사를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그리하여 그것은 우리네 마음자리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모종의 향수를 자극하고 고향의 원형을 떠올리게 하는데, 그 순간 독자들은 정동(情動)의 울림과 파장을 느낄 수 있다. 찰스 디킨스의 말처럼 고향은 자신의 다른 이름이자 강력한 말이다. 마법사가 외우는, 혹은 영혼이 응답하는 가장 강력한 주문보다 더 강렬한 것이다.『관촌수필』이 보여준 고향에 대한 울림과 파장은 단순한 노스탤지어와 구별된다. 『관촌수필』에서 ‘관촌’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두 개의 ‘고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하나는 화자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충족과 조화의 고향이고, 나머지 하나는 화자가 현실로 맞닥뜨린 결핍과 파괴의 고향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문구가 끄집어 낸 기억은 개인적 차원의 고립적이고 단절된 기억이 아니라 일종의 ‘집합 기억’, 즉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성격을 지니며 당대의 보편인들이 공유함으로써 반영적(反映的) 측면과 조형적(造型的) 측면을 동시에 갖는 기억이라는 점이다. 소설이 창작된 1970년대와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해방과 한국전쟁을 전후한 때임을 고려할 때, 이것은 전통과 근대, 공동사회와 이익사회, 농촌공동체와 근대화 담론의 대립이다. 말하자면 『관촌수필』의 화자는 고향과 고향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 유년시절에 경험한 농촌공동체의 조화와 따스한 인정을 기억의 우물 속에서 길어내는 동시에 산업화 과정에서 겪게 되는 농촌사회의 소외와 해체 과정을 보여주고 들려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관촌수필』의 화자가 두 개의 ‘고향’을 동시에 호명하고, 충족과 조화의 고향을 기억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서러움의 실체는 더 이상 개인적 차원의 서러움이 아니다. 『관촌수필』의 화자인 ‘나’가 잃어버린 것은 더 이상 혼자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가 잃어버린 것의 의미로 증폭된다. 또 ‘나’를 키운 사람들은 우리와 더불어 살던 사람들이고, 종내는 우리가 잃어버린 심성들이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리하여 『관촌수필』의 압권인 공산토월(空山吐月)에서 빈산에 홀로 뜬 둥근 달이 다름 아닌 신석공이었음을 알았을 때, 그 짤막한 소설의 마지막 문장(“나는 울었다.”)을 읽은 독자들은 긴 여운으로 잃어버린 고향과 잃어버린 시대의 가치를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러한 가치를 공감할 수 있을 만큼 당시 한국사회는 전통과 근대의 요소가 공존하는 중층구조로 되어 있었고, 해체되어 가는 공동체의 모습도 조금만 손을 뻗으면 잡힐 듯한 시간과 거리에 있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말로 쓰는 소설, 문학어의 확장이문구 문학에는 모종의 ‘낯섦’이 존재한다. 『관촌수필』도 예외가 아니다. 소설 내내 도무지 눈에 설고 생경한 어휘와 잘 읽히지 않는 문장이 빈번하다. 놀라운 것은 나중에 찾아보면 대개는 그런 어휘와 말이 국어사전 어딘가에 버젓이 등재돼 있다는 사실이다. 근대 이후 소설을 읽어온 독자들에게, 그것도 소리 내지 않고 눈으로 읽어야만 하는 독서법(묵독)을 배워온 독자들에게, 이문구의 소설은 자꾸만 입 밖으로 소리를 내도록 만들고, 그럴 때마다 리듬이 생기게 만들고, 끝내는 소리 내어 읽어야만 하는 독서법(낭독)을 복원한다. 이러한 바탕에는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의 세계가, 표준어가 아닌 토속어와 방언의 세계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불쑥불쑥 등장하는 낯선 어휘와 긴 호흡의 의고체 문장 탓에 때때로 이문구의 문학이 포스트모던하게 느껴진다는 반응이나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푸념, 그래서인지 내용이 잘 안 들어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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