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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장하고 있는 플라톤의 대화편 책 중에는 오래전에 출판된 자유교양도서가 한 권 있다. 질 나쁜 종이를 쓴 탓에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누렇게 바래다 못해 푸석푸석해질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다. 하지만 그 동안 공간 부족을 구실로 내다버린 수천 권의 책들을 물리치고 아직도 연구실 책장에 당당하게 꽂혀 있다. 장담컨대 이 책은 몰골이 더 험해지거나 공간 부족이 훨씬 심각해진다 해도 결코 버려질 일은 없을 것이다.

50년 전에 번역된 플라톤인 만큼 그 자체로 소장 가치가 충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이 책을 각별히 아끼는 이유는 따로 있다.

얼마 전 학교 근처 헌책방에 들렀을 때다. 책방 구석진 곳에 빛바랜 책들이 쌓여 있었는데, 그 가운데 표지에 ‘플라톤’이라고 써진 책이 눈에 들어와 무심코 손으로 집었다. 1970년대에 출판된 책으로 400쪽이 넘는 두께임에도 요즘의 책과 달리 무게가 무척 가벼웠고 종이가 삭아 금세라도 바스라질 것처럼 위태롭게 너덜거렸다.

여러모로 볼품이 없었지만 나는 그 책이 마음에 들었다. 고색창연한 데다 펼침성 좋은 실 제본이었고 무엇보다 가장자리가 어두운 갈색으로 변색돼 책을 펼쳐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활자가 찍힌 부분이 환하게 떠오르며 아스라해지는 느낌이 좋았기 때문이다.


집에 와서 책을 꺼내 조심스럽게 펼쳐보던 나는 책 속표지에서 뜻밖의 이름을 발견하고 전율했다. 거기에는 ‘72.5.26’이라는 날짜 표기와 함께 한자로 ‘朴龍河’라고 쓰여 있었다. 책을 처음 구입해 소장했던 사람의 이름일 뿐이지만 그 이름은 대번에 나를 수십 년 전 고등학교 시절로 되돌려 보냈다. 그렇다. 나는 거기 적힌 박용하라는 이름의 주인공을 안다. 그는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내내 하숙을 했던 하숙집 주인 아들이었고 그 시절 나의 데미안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고향을 떠나 서울로 전학 온 뒤 줄곧 친척 집에서 생활하던 나는 고등학교가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배정되는 바람에 학교 근처로 옮겨 하숙을 했다. 하숙이라고는 하나 하숙을 업으로 하는 집이 아니었다. 마침 방 한 칸이 비어서 하숙을 치는 참이었기에 나는 그 집에서 마치 한 가족이라도 된 것처럼 생활했다. 그때 하숙집 주인을 어머니라고 불렀는데, 어머님 성함은 ‘이수자’ 님이고 아드님 성함이 바로 ‘박용하’다.


당시 그가 대학을 막 졸업하고 방송사에 취직해 지방으로 발령을 받아 내려가게 되었기에 그가 쓰던 방에 내가 하숙하게 된 것이다. 덕분에 그 방 책꽂이에 꽂혀 있던 책들과 함께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게 되었는데 내가 얼마 전 입수한 이 책도 거기에 꽂혀 있던 책 중의 한 권이었다.


언젠가 내가 학교 공부하느라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투덜대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책을 읽어라. 책을 읽을 때는 다른 일은 제쳐두어도 된다. 책을 열심히 읽으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고 미래를 선택할 수도 있다. 그게 학교 공부 잘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나는 그 말의 영향을 지금까지도 받고 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책을 읽는다. 아는가? 진짜 꿈은 자면서 꾸는 게 아니라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꾸는 것이라는 사실을. 책을 읽을 때 그것이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사족(蛇足)을 덧붙인다. 사방으로 수소문했지만 박용하 형의 소식을 알 길이 없다. 누구 아시는 분 있으면 부디 알려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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