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우리말에서 읽는 한국인의 심층

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 12월 5일에 ‘국민교육헌장’을 선포했다. 이때부터 관공서나 학교에서 중요한 행사를 치르면, 반드시 식순의 첫머리에 이 ‘국민교육헌장’을 읽어야 했다. 정부에서는 학생들이 ‘국민교육헌장’을 외도록 이끌었고, 교과서에도 첫머리에 ‘국민교육헌장’을 싣도록 했다. ‘국민교육헌장’을 만드는 일에 학자, 정치가, 관료가 함께 했다. 그 가운데서 박종홍, 이인기, 유형진, 박준규, 이만갑, 김성근, 정범모, 이규호, 박희범과 같은 이들이 중심을 이뤘다. ‘국민교육헌장’의 앞 부분은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라고 돼 있다. 이것을 읽고 외운 사람들은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이룩하는 것”을 마땅히 해야 하는 일처럼 여기게 됐다. 이때부터 ‘조상의 빛난 얼’이라는 말이 일상으로 널리 쓰였다.  ‘국민교육헌장’에 ‘조상의 빛난 얼’이라는 말이 들어가게 된 것은 위당 정인보가 1935년 1월 1일부터 1936년 8월 26일까지 <동아일보>에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사를 연재한 것에서 비롯한다. 정인보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역사’라는 제목을 붙일 수 없는 상황에서 ‘조선의 얼’이라는 어정쩡한 제목으로 4년에 걸쳐서 한국사를 연재했다(위당은 해방 후에 이를 『조선사연구』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그런데 정인보는 1935년에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라는 연재를 시작하면서, 첫머리에 얼의 뜻을 풀었다. 그는 “누구나 어릿어릿 하는 사람을 보면 얼빠졌다고 하고, 멍하니 앉인 사람을 보면 얼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사람의 고도리는 얼이다. 얼이 빠져버리었을진대, 그 사람은 껍풀사람이다. 이것은 그리 신기한 말이 아니다. 초동목수(樵童牧竪)라도 다 아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얼핏하고 얼른하고 얼추하는‘얼’의 단계에 머무르는 사람은무엇을 제대로 알아보고, 알아듣고 알아차릴 수 없다. 옛사람들이 넋이라고 말한 것을 굳이 얼로 바꾸어서 말하는 우리의 말버릇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위당 정인보가 말한 ‘조선의 얼’그의 말을 살펴보면 1. 얼은 사람의 껍풀 속에 들어 있는 것이고, 2. 얼은 빠져서 줄어들 수 있는 것이고, 3. 얼이 빠져서 줄어든 사람은 어릿어릿하게 되고, 4. 얼이 모두 빠져버린 사람은 멍하게 되고, 5. 얼은 사람의 고도리인 것이다. 그는 조선 사람은 조선의 얼을 굳게 지켜서, 오천 년을 이어온 겨레의 줏대를 살려가야 한다고 말했다.     정인보가 이야기하는 얼은 넋, 혼, 백, 정신 따위와 비슷하다. 그는 최석하, 박은식, 신채호, 김규식, 주시경, 안재홍, 문일평 등이 말해온 국성(國性), 국혼(國魂), 국수(國粹), 민족정기(民族正氣), 조선심(朝鮮心)과 같은 흐름 위에서 조선의 얼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조선의 얼은 굳이 뜻을 풀어주어야 할 만큼 낯설고, 미지근한 말이었다. 그는 일제의 검열을 벗어나기 위한 방편에서 이런 식으로 제목을 붙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주시경이 ‘대한의 글’이라는 말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한글’이라는 말을 만들어 썼고, 최현배가 ‘대한의 말본’이라는 말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 말본’이라는 말을 만들어 쓴 것과 같은 방식이다.        정인보는 ‘조선의 얼’에서 얼을 좋은 뜻으로 썼다. 그는 “얼이 사람의 고도리이다”라고 말하면서, 얼을 넋이나 혼을 추스르는 줏대처럼 풀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이 나날이 쓰는 얼이라는 말은 그렇게 좋은 뜻으로 쓰이지 않는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어떤 것이 어설프거나 어리석은 상태에 있을 때, ‘얼’이라는 말로써 ‘얼추’, ‘얼치기’, ‘얼간이’, ‘얼뜨기’, ‘얼핏’, ‘얼른’, ‘얼렁뚱땅’, ‘어리바리’, ‘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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