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식물성의 사유로 읽어낸 역사 속의 여성

“할미가 후손에게 꼭 부탁한다. 너희들은 조상님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나 생각도 하며 금전과 권력에 눈이 어두워서는 못쓰느니라. 사람이 해야 할 일 외에는 해서는 안 되느니라. 시국을 좇아 오륜을 알아야 하느니라. 매사는 자신이 알아서 흐르는 시대에 따라 옳은 도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여 살아가기 바란다. 충효정신을 잊어서는 아니 되느니라. 윤씨 할머니가 자손들에게 보내는 말이니라.”(「해주 윤씨 일생록」중에서)평화의 굴렁쇠 소년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에는 지구인들을 숨죽이게 한 장면이 있었다. 조용한 푸른 잔디 위에서 8세 어린이가 굴렁쇠를 굴렸다. 평화와 화합을 상징하는 커다란 원이었다. 세계인을 감동시킨 이 무대는 이미 1941년 중국 땅에서 이뤄졌다. 여덟 살짜리 나라 잃은 고아 소년이 밤새 굴렁쇠를 굴리며 삼촌들의 일을 도와 항일독립투쟁의 연락책 임무를 수행했다. 해성에서 심양까지 200㎞가 넘는 길, 무순에서 심양까지 50㎞가 넘는 길을 굴렁쇠에 의지해 하루 이틀을 걸었다. 안전을 위해 피투성이 발로 인적 없는 오솔길을 달린 소년의 모습이 50여년 후 해방된 조국에서 평화의 올림픽 개막행사로 재현됐다. 광복을 위해 달리고 달린 이 소년은 누구인가? 유연익! 한국 최초의 여성의병장 윤희순 의사의 손자다.  윤희순 의사는 희생가지였다. 희생가지, 희생지는 나무의 줄기를 키우기 위해 살려두는 가지다. 윤희순 의사는 자신과 후손들을 철저히 희생했다. 대한민국의 광복을 위해 온전한 숙명으로 묵묵히 희생지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가 지켜낸 바로 그 땅에서 우리는 평화의 굴렁쇠를 굴린다.총을 든 여성들1875년, 서울 해주 윤씨 가문의 딸이 춘천의 고흥 유씨 유제원에게 시집 왔다. 첫날 밤, 갑자기 불이 났다. 시아버지는 며느리를 안전한 곳에 피신시켰다. 하지만 열여섯 새색시는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장삼과 족두리를 벗어던지고 불길을 잡는 데 뛰어들었다. 한국 최초의 여성의병장 윤희순(1860~1935) 의사의 이야기다. 윤희순의 시댁은 아버지 윤익상의 화서학파 동문인 유홍석의 집안이다. 시부인 유홍석은 춘천을 대표하는 의병장이고 그의 6촌 형제인 유인석은 13도의군도총재를 지낸 인물이다. 윤희순은 시아버지 유홍석을 모시며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마음을 키운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시부 유홍석과 남편 유제원은 다시금 의병투쟁을 위해 집을 떠난다. 윤희순은 친척과 동네 사람들을 설득해 ‘안사람 의병단’ 30명을 조직해 총탄을 제조하고 직접 군사훈련을 하며 무기와 군자금을 의병에게 전달하는 일을 했다. 당시 같은 마을의 친척 부인이 쓴 편지에는 “윤희순이 밤낮없이 노래를 하는데 부르는 가사가 왜놈들이 들으면 죽을 소리만 하니 걱정이로소이다. 실성한 사람 같습니다. (…) 요사이 윤희순이 누구냐고 묻는 사람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일러주옵소서” 라는 내용을 볼 수 있다. 그 노래는 윤희순의 대표작인 안사람 의병가였다. “우리나라 의병들은 나라찾기 힘쓰는데 우리들은 무얼 할까. 의병들을 도와주세. (…) 우리들도 뭉쳐지면 나라찾기 운동이요 우리조선 아낙네들 나라 없이 어이 살리. 힘을 모아 도와주세.” 이렇게 노래를 지어 함께 부르며 마을의 이웃과 친척들을 독려했다. 이국땅에서 피운 꽃과 잎나무둥치와 뿌리가 한 나라라면 나무의 가지와 꽃과 잎은 나라에 속한 백성이다. 조선이라는 나무의 중요한 가지인 의병장 유홍석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국권회복 투쟁을 위해 만주로 망명한다. 중국 랴오닝성 깊은 산골로 이주한 윤희순도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12년 ‘노학당’을 세워 교장으로 활동하며 50여 명의 애국지사를 길러낸다.하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노학당은 3년 뒤 폐교됐고, 1913년부터 1915년에 걸쳐 시아버지와 남편이 별세하는 슬픔을 당한다. 그러나 윤희순은 중국인들을 독려하고 계몽해 조선족과 한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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