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R의 공포를 넘어서]


지난 10월 초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IMF 신임총재는 취임 이후 첫 공식연설에서 전 세계적인 경기둔화를 경고한 바 있다. 특히 게오르기에바 총재는 독일, 네덜란드와 함께 우리나라를 재정 여력이 있는 국가로 구체적으로 거론하면서, 인프라와 연구·개발(R&D)을 중심으로 재정지출을 확대하는 것이 수요와 성장잠재력을 뒷받침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며 적극적인 확대재정정책을 권고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IMF는 세계경제전망을 발표하면서 우리나라의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의 2.6%에서 2.0%로 대폭 하향조정했다.
이를 보면, 우리나라 정책당국에 대한 IMF의 주문은 매우 분명한 것 같다. 즉, 앞으로 경기가 많이 가라앉을 듯하니 정부는 여력이 있을 때 돈을 더 쓰라는 것이다. 회원국의 채무상환능력과 재정건전성 제고를 금과옥조로 삼는 IMF가 이렇게 회원국 정부에 돈을 쓰라고 권고하는 것은 정말 이례적인 일이다. 이를테면 빚쟁이가 채무자에게 빚을 독촉하는 대신, 잘 먹고 다녀야 일해서 빚도 갚을 수 있다며 소비를 늘리라고 권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IMF의 이례적인 주문

사실 IMF 총재가 콕 찍어 확대재정을 주문한 독일과 우리나라 정부는 재정이 부실할래야 부실할 수가 없는 나라다. 왜냐하면 세금은 비교적 ‘돈 샐틈 없이’ 척척 걷는 데 반해, 정부가 자린고비인 탓에 조금 적자가 난다 싶으면 당장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법석을 떨기 때문이다. 몇 달 전 있었던 웃지 못할 일화는 이러한 우리나라의 과도한 재정보수주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지난 5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경제부총리가 국가채무비율을 GDP 대비 40% 수준에서 관리하겠다고 보고하자, 대통령이 100%가 넘는 OECD의 평균 국가채무비율을 언급하면서 이러한 ‘마지노선’의 당위성에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 이를 계기로 정치권뿐만 아니라 학계를 중심으로 국가채무비율의 마지노선에 대한 논란이 확산됐다. 일각에서는 재정보수주의자들의 단골 레퍼토리인 급속한 고령화와 잠재적 통일비용 등을 되뇌이면서, 우리나라가 곧 그리스나 베네수엘라와 같이 될 것처럼 겁을 잔뜩 주기도 했다. 그런데 곧 이러한 논쟁의 의미를 무색하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국은행이 국민소득 통계의 기준년 개편에 따라 GDP 규모를 재추산한 결과, 지난해 GDP가 6% 넘게 높아지면서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이 기존의 38.2%에서 35.9%로 뚝 떨어진 것이다. 40% 마지노선에 대해 갑론을박을 벌이던 정치인이나 경제학자들은 모두 머쓱해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최근 정부가 510조가 넘는 사상 최대 규모의 내년도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이러한 논쟁이 다시 불붙고 있지만 말이다.
우리나라의 과도하다 못해 병적인 재정보수주의는 선진국 가운데 성장세가 가장 강한 미국과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미국 경제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 무려 123개월 동안 경기확장이 지속되면서 사상 최장의 호황 기록을 매달 갈아치우고 있다. 이는 2017년 9월을 정점으로 2년째 경기가 수축하면서 급기야 지난 1분기에는 10년 만에 최저 수준의 마이너스 성장률(전분기 대비)을 기록한 우리나라와 크게 대조된다.
한편 재정건전성 측면에서도 방향은 다르지만 미국과 우리나라는 크게 대조된다. 2018년 현재 미국의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OECD 평균과 마찬가지로 100%를 훌쩍 넘으며, 연방정부 재정적자는 4년 연속 증가해 최근 2019년 회계연도에는 GDP 대비 4.6%에 이른다. 반면 상기한 대로 우리나라의 국가채무비율은 40%를 채 못 넘어 미국뿐 아니라 OECD 국가 평균에 비해 턱없이 낮으며, ‘슈퍼예산’으로 불릴 정도로 예산규모가 확대되는 내년에도 여전히 40%를 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표 참조).
상황이 이런 데도 지금 미국에서 재정지출을 줄이거나 세금을 더 거둬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나 민주당 대선주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여야를 막론한 정치인들과 과거 균형예산을 신조로 삼아왔던 로렌스 서머스 같은 보수적인 주류경제학자들까지도 확대재정정책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IMF의 권고가 약발이 있었는지 아니면 경기침체의 불똥이 발등에 떨어져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우리 정부도 뒤늦게 돈을 쓰겠다고 나섰다. 전년 대비 지출이 9.3% 증가한 내년도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한 것이다. 특히 이는 내년도 세금수입이 거의 증가하지 않거나 오히려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지출만 증액한 것이어서, 지난 3년간 꾸준히 발생한 초과세수로 인해 ‘무늬만 확장재정’이던 것과는 크게 달라진 정책기조라고 할 수 있다. 주요 증액 분야는 산업·중소기업·에너지 분야와 연구개발 분야, 그리고 사회간접자본 분야와 일자리 예산을 포함한 보건·복지·고용 분야로서, 주로 내수 확대와 함께 신산업 육성을 통한 성장동력 창출에 역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0좋아요 URL복사 공유
현재 댓글 0
댓글쓰기
0/300

사람과 삶

영상으로 보는 KNOU

  • banner01
  • banner01
  • banner01
  • banner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