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현상에서 사회 현상으로, 그리고 인간 현상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나의 경로는 롤랑 바르트에 관한
박사논문을 쓰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나는 방송대에서 나만의 ‘호크와 고리’를 찾아 나아가려 한다.
원자핵공학과를 졸업하고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따라오는 질문이 있다. 아니 왜 공대를 나와서…? 출판사에 취직했을 때, 불문과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 프랑스 유학 시절에, 그리고 이곳 동숭동에 자리잡은 최근까지도. 진로의 급변과 프랑스 문학에로의 늦은 투신은 순간순간의 우연한 선택들로 다져진 자연스런 한 인생의 경로일 뿐 ‘여기에 이렇다 할 필연이란 없다’라고 나는 느낀다.
회피하기 힘든 저 질문에 항상 곤궁한 대답으로 응수하면서도 묻는 이가 듣길 바라는 그럴듯한 서사를 구축하길 애써 외면해 왔던 이유는, 언어화되자마자 하나의 픽션으로, 즉 가짜 필연으로 응고되고 마는 서사의 운명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이 지면을 빌려 그간 밟아온 길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는 짤막한 서사를 한번 꾸며내 볼까 한다. 이 가짜 실화의 제목은 이쯤 되겠다. 어찌하여 나는 여기에 이르게 됐나?
학부 시절 전공 수업, 그러니까 대개 수학이나 물리학에 해당하는 수업을 들을 때마다 늘 답답함을 느끼곤 했다. 당시에는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했던 그 답답함을 표현할 말을 군복무 무렵 읽은 하이젠베르크의 회고록 부분과 전체에서 얻게 된다.
미래의 저명한 핵물리학자는 고등학생 시절 이런 의문을 품는다. 탄소원자와 산소원자의 결합을 설명하기 위해서 고리와 호크 그림으로 원자들 사이의 연결을 표현한 저 물리 교과서의 도해는 도대체가 터무니없지 않은가? 친구들과의 토론에서 철학을 대변하는 한 친구의 대답을 통해 소년 하이젠베르크는 모종의 혜안을 얻는다. “우리는 대상을 직접 인지할 수 없다. 먼저 대상을 표상으로 변환시키고, 그 표상들로부터 마침내 개념을 형성해야 한다.” 답답함의 정체는 이것이었다. 순수한 규칙들의 체계인 저 복잡다단한 수식들을 표상으로 변환시키지 못하는 어떤 무능에서 오는 답답함. 그리고 얻은 혜안, 우리는 이해 가능한 표상들로만 세계를 지각한다.
19세기를 살았던 한 유럽 사상가의 사회이론에 매료돼 사회학과로의 전과를 꾀했던 것도 그 때문일까? 경제적 토대와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라는 명쾌하고 단순한 건축적 표상을 가지고 일필휘지로 세상을 해석할 수 있도록 하는 틀을 제공하기 때문에? 그러나 사회학의 이론 틀이 매우 성글며, 그 틀에서 빠져나가는 것들이 무척 많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대강 출판사에서 일할 무렵이라고 해두자.
세계를 이해하려면 분석의 단위는 사회나 집단이 아닌, 한 명의 인간, 개별적이고 고유한 한 명의 인간이 돼야 하며, 그 인간을 구성하는 욕망과 환상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개별 인간의 욕망과 환상을 지각할 수 있도록 하는 표상, 그것이 바로 인간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서의 픽션이다. 문학을 연구하기로 마음먹은 데는 아마도 이런 생각이 깔려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프랑스 문학 비평가 롤랑 바르트의 글에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발견한 것이 먼저였을까?
“우리는 섬세
함의 결여로 인해 과학적이 된다.” 또는, “학문은 성글고, 삶은 섬세하다. 문학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 간극 때문이다.”
자연 현상에서 사회 현상으로, 그리고 인간 현상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경로는 결국 롤랑 바르트에 관한 박사논문을 쓰는 것으로 일단락됐고, 나는 여전히 이곳 방송대에서 나만의 ‘호크와 고리’를 찾아 나아가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