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연동(嬋姸洞)’은 평양 기생의 북망산(北邙山)으로 알려진 평양부 북쪽 ‘칠성문’에 있었던 기생의 묘지를 말한다. 고려 후기부터 조성된 기생의 무덤이 총총히 있었던 곳을 ‘선연동’, 즉 기생의 ‘곱고 예쁜 고을’이라 불렀다. 이후 시인들에 의해서 평양기생의 것만이 아니라, 조선 기생의 북망산이라는 의미로 확장됐다.
당시 평양은 조선과 중국 간 사행로(使行路)의 선상에 있어서 사신(使臣)들이 머무는 주된 경유지였다. 명대 사신들이 사행차 조선에 왔을 때 평양에 머물면서 대동강에서 뱃놀이를 하거나 부벽루와 연광정, 을밀대, 모란봉 등을 비롯한 여러 명소를 둘러보았다. 당대 시인들은 마침 기자묘 근처 길가에 있던 기생의 공동묘지, 즉 ‘선연동’의 기생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조선 후기 문인, 홍만종의 『소화시평』에는 “‘선연동’은 중국 당나라 장안(長安)에 궁인을 장사지내는 골짜기 묘지로 알려진 ‘궁인야(宮人斜)’ 같은 곳으로 이곳을 지나는 시인들은 반드시 시를 남겼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조선 중기 문인 석주 권필은 선연동에서 꽃다운 넋을 추모하며 뛰어난 시를 지었다. “거친 무덤에도 해마다 봄빛은 찾아와 / 꽃으로 단장하고 풀로 치마 둘렀네. / 이 많은 꽃다운 혼들 아직 흩어지지 않고 / 오늘도 비가 되고 구름이 되네.” 석주는 거친 무덤에 찾아온 봄기운을 꽃단장에 풀치마를 두른 여인으로 표현한다. 이는 선연동을 아름다웠던 생전의 기생의 모습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러면서 많은 꽃다운 혼들이 아직도 비와 구름이 되어, 마치 ‘조운모우(朝雲暮雨)’처럼 흩어지지 않고 살아있다고 낮은 소리로 읊조리고 있다. 이는 남다른 표현으로 ‘무산지몽(巫山之夢)’, 즉 중국 초나라의 양왕(襄王)이 낮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무산신녀(巫山神女)를 만나 즐거움을 누렸다는 고사를 이끌어낸다.
조선 후기 청나라 견문기로 박사호의 『심전고(心田稿)』(1828년 11월 5일)가 있다. 여기에서도 “평양 선연동은 길가에 있는데 예부터 고을 기생을 장사지내는 곳이다. 올망졸망한 무덤들이 인가도 드문 쓸쓸한 들풀 속에 묻혀 있다”라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선연동은 단순한 기생들의 무덤이라 할 수 없다. 처연한 삶을 살아간 기생이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옮겨가는 공간이었다. 인간의 죽음을 북망산천으로 형상화하듯, 선연동은 기생의 죽음을 형상화하는 매체가 된다. 선연동은 시를 통해서 평양기생의 것만이 아니라, 조선 기생의 북망산으로, 그리고 다시 풍류의 개념으로 확대된다.
‘기생’이라는 주제는 누구나 익숙하게 들어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과연 우리는 ‘기생’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그저 전해 들었을 뿐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가 대부분일 수도 있다. 여러 문화원형 중에서 디지털 콘텐츠의 대상으로 기생은 특별히 매력적이다. 특유한 팜므파탈의 이미지와 함께 이중적인 삶의 굴곡이 잘 드러나 있는 극적 대상이기 때문이다. ‘선연동’을 소재로 삼은 시인들은 시간을 초월해 공간에 접속한다. 그곳에서 무수한 담론들을 만들고 그에 따라 시문을 지었다. 그렇게 시인들은 선연동에서 기생들의 생전의 모습과 죽은 뒤의 모습을 대비적으로 음영하기
를 즐겼다. 시인과 ‘선연동’의 절묘한 만남이다.
기생은 사대부 연회에서 가무음률과 시서화를 할 줄 아는 해어화로 불리며 ‘선연동’에 묻혔지만, 시인들은 손님으로 그곳을 찾아 아쉬웠던 풍류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을 시로 다시 살려낸다. 또 ‘선연동’에 묻혀 있는 아름다운 기생들을 추모하면서 속절없는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는 감회를 남긴다. 술 한 잔을 부르는 감동적인 스토리텔링이다. 신현규중앙대 교수·고전문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