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여행은 방송대 학우들에게
하나의 ‘은유’다.
무작정 뛰어들어서도 안 되고,
목적과 계획을 분명히 해야 하고,
인내하면서 한 걸음씩
전진해야 하니 그렇다.
코로나19로 하늘길이 막히자 여행자들의 발길이 온통 제주도로 이어지고 있다. 제주도의 재발견은 분명 좋은 현상이지만, 어디 여행길이 제주도뿐일까? 무작정 겨울 동해(東海)로 떠나는 여행에서부터 전국 곳곳 숨어 있는 겨울 여행지는 노발리스의 시구(詩句)처럼 ‘길이 끝나자 여행이 시작된다’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는 유혹지다. 117호 커버스토리에서는 겨울여행의 의미를 짚었다. 다른 계절의 여행과 달리, 춥고 고달픈 시간 위를 걸어가면서 길을 만드는 것은, 결국 ‘자신의 내면’을 직시하면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지적 여정일 수도 있다. 1면과 2면에서는 겨울여행의 남다른 의미를 찾아보고, 3면에서는 방송대 학우와 동문들이 추천하는 각자의 ‘겨울여행 명소’를 함께 소개한다.
최익현 선임기자 bukhak@knou.ac.kr
2017년 개봉한 독립영화 「다른 길이 있다」(조창호 감독)는 자살 사이트에서 만나 동반자살을 계획하는 남녀의 이야기를 스크린에 담았다. 막다른 절망의 길목에서 두 사람은 한겨울 춘천을 찾는다. 어두운 결론에 도달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가족이 함께 관람해도 괜찮은 영화다.
이 영화의 부제 ‘모든 길의 끝에는’에 눈이 머문다. 길의 끝에 다른 길이 있다는 성찰이기 때문. 아픔을 간직한 이들만이 아픔을 바라볼 수 있고, 껴안을 수 있으며, 위로할 수 있다는 메시지다. 눈 내린 겨울 소양호를 비롯한 춘천의 풍경들은 넉넉한 배경이 되면서, 동시에 두 사람의 아픔과 동화되는 어떤 순간으로 안내하는 초대장이 된다.
여행작가 임운석은 『내가 선택한 최고의 여행 11: 겨울여행』(시공사, 2017)에서 갑자기 시간이 났을 때, 1박 2일로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 어디로 가면 좋겠냐고 묻는다. 그는 그날의 기분에 맞춰 선택하고 즐길 수 있는 겨울여행지를 소개했지만, 사실 겨울여행은 준비 없이 훌쩍 떠나면 낭패를 겪기 쉽다. 봄이나 여름, 가을의 여행과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확실한 목적과 준비가 필요한 여행이다 보니, 쉽사리 나서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겨울여행은 여행의 참맛을 일깨워주는 매력이 있다.
눈의 계절, 여행의 참맛과 매력
그 매력의 정체는 무엇일까. 경제지 편집국장 출신의 한 시인은 “계절마다 여행의 맛은 저마다 특색이 있지만, 겨울여행은 인내를 배우는 게 최고의 맛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사계절을 동서와 남북을 가로지르며 이 땅 곳곳을 훑는다. 겨울에 떠나는 여행이야말로 자신에게 ‘인내’를 선물하는 특별한 경험이라고 말하는 그의 말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영동지역의 한 단위농협에 일하는 최윤석 씨는 자타가 인정하는 산행 마니아다. 태백산맥을 따라 태백산, 두타산, 청옥산을 누비는 그는 겨울여행, 특히 겨울산행을 가리켜 “숨겨져 있던 자연의 속살을 느끼고, 푸른 생명을 기억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경남의 한 민예총에서 활동하는 강 아무개 씨에게 겨울산행의 묘미는 ‘눈’이다.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어 사람의 흔적을 모두 지워버린 그때부턴 짐승들의 시간이다. 짐승들의 발자국만 간간이 있는 그곳에 첫 길을 내면서 걷는 기분은 두려움과 경외감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하다”라고 말하는 그는, 설산을 걷는 기분이 쿠션 위를 걷는 느낌 같단다.
김미선 학우(농학 3)는 최근 덕유산 향적봉을 다녀온 뒤로는 겨울 산의 매력에 흠뻑 취했다. “봄이 오기 전에 딸아이와 함께 다시 덕유산을 산행할 계획을 세워본다”라는 그에게 겨울 산의 매력은 가지마다 소복소복 쌓여 있는 눈과 상고대다.
위로가 아닌 상처의 무게를 직시하다
겨울여행과 산행을 말하는 이들에게서 공통으로 느껴지는 게 있다. 어느 시인이 노래했듯, 눈꽃의 화음이 빚어내는 고요의 순간, 겨울 나뭇가지들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뚝뚝 부러지는 소리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일깨우면서, 티끌만 한 내 존재의 무게에 겸허해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그곳에서 씻고, 내려두고 오는 것이 아니라, 상처의 무게를 직시하게 한다는 뜻이다.
이쯤에서 드는 질문 하나. 그렇다면 어디로 떠나는 게 좋을까. 사진과 여행 전문 블로그 ‘행복한 해변무드역’을 운영하는 여행 사진가 문철진은 『대한민국 풍경사진 레시피 69』(미디어샘, 2021)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 여행지 최고의 포토존 69곳을 엄선했다. 3년 가까이 전국 방방곡곡을 발로 뛰며 경험했던 수백 가지 풍경 가운데 최소한 3~4번, 많게는 20번 이상을 찾아간 끝에 얻어낸 69곳의 사진들이다. ‘사진’에 매료될 수도 있겠지만, 사진 속의 바로 그 공간과 풍경의 매력을 참고해보자는 것.
그가 엄선한 겨울 최고의 풍경은 내장산국립공원, 사천 실안, 청도 혼신지, 덕유산 향적봉, 태안 꽃지해수욕장, 합천 황매산 등 대부분 익숙한 공간들이다. 이 익숙함이 ‘길을 떠나는 것’을 가로막을 수도 있겠지만, 사진가의 눈에 들어온 피사체를 해석하는 시선을 참고한다면, 나만의 겨울여행을 완성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1844년 추사 김정희는 유배지 제주에서 사제 간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두 차례나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을 구해다 준 역관(譯官) 이상적(1804~1865)의 인품을 날씨가 추워진 뒤에 제일 늦게 낙엽 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해 「세한도(歲寒圖)」를 그렸다. ‘세한’은 한겨울 추운 날씨를 의미하니, 「세한도」는 내면의 인품을 담아낸 그림이면서 동시에 내면을 찾아가는 여정을 빚어낸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겨울여행’은 방송대 공부의 은유
제주의 절해고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된 추사에게 세상의 모든 이들이 등을 돌렸지만, 이상적은 달랐다. 그는 중국에서 귀한 책을 구해 추사에게 계속 보냈다. 추사는 책에서 학문과 예술의 근원을 찾았다. 추사는 이상적의 변치 않는 의리를 『논어』의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라는 유명한 구절에 빗대어 칭찬하고 그림으로 표현했다. 프란시스코 고야나, 클로드 모네, 반 고흐가 그렸던 겨울 풍경과는 전혀 다른 세계다.
방송대 공부를 ‘지적 여정(旅程)’이라고 말하는 방송대 학우들이 많다. 생업과 공부를 함께 하는 일 자체도 어렵지만, 새로운 앎을 알아가고, 이를 자기 삶에 온축하는 것도 호락호락하지 않아서다. ‘겨울여행은 인내를 가르친다’라는 한 시인의 말처럼, 방송대 공부도 인내의 연속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겨울여행은 방송대 학우들에게는 하나의 ‘은유’가 된다. 무작정 뛰어들 어서도 안 되고, 목적과 계획을 분명히 해야 하며, 인내하면서 한 걸음씩 전진해야 하니 그렇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