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기념일의 힘

3월 9일은 대한민국의 새 대통령을 뽑는 날이면서, 방송대 개교 50주년 기념일이다. 방송대가 대한민국의 고등평생교육을 주도한 지 벌써 반세기가 됐다. 방송대의 평생교육으로 세상을 더 넓고 깊게 보게 됐다는 사람이 많다. 역사적인 이날, 우리가 기념해야 할 기억을 미래에도 공유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속에 ‘기억의 공간’ 한 자리를 마련해 놓는다면 시간이 흘러도 생생하게 기념할 수 있지 않을까?

 

기억의 공간이란

사회 구성원들에게 중첩적으로

연결된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 속에 공유되는 보편적인

기억으로서, ‘의미

계승을 위한 정신적 공간이다.

 

 

 

 

기념일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뜻깊은 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기념일은 제정 주체인 국가나 UN, 민간에 따라 성격도 다양하다. 이번 호 커버스토리에서는 이런 기념일에 대한 숙고를 통해 기념일을 왜 그리고 어떻게 기념해야 하는지살펴본다. 이어 2면에서는 방송대 가족들이 이야기하는 나의 기념일에 대한 사연을 들어본다. 이를 통해 2022년 방송대 개교 50주년 기념이 갖는 의 의미를 생각하고자 한다.

 

이런 날도 있데이

방송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한 동문은 이런저런 기념일을 모두 챙기려면 일 년 내내 신경 써야 해요. 모든 날이 다 기념일이죠. 밸런타인데이부터 빼빼로데이까지. 삼일절, 어버이날, 생일, 추석 ···. 오늘이 기념일인지, 왜 기념일인지도 모르겠어요. 부끄럽지만 솔직히 이야기하면 저에게 의미 있는 기념일은 휴일이 되는 기념일뿐이에요.” 이 동문의 말처럼 세상에는 기념일이 너무 많다. 그런데 기념일을 살펴보면, 기념일 제정 주체에 따라 국가에서 법령으로 제정해 기념하는 날 UN이 제정한 국제 기념일 민간 기념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국가에서 정한 기념일은 공휴일의 유무로 구분할 수 있다. 공휴일로 정해진 법정기념일은 삼일절(31), 부처님 오신 날(음력 48), 광복절(815), 개천절(103), 기독탄신일(1225) 등이 있다. 공휴일이 아닌 법정기념일은 기획재정부가 정한 납세자의 날(33), 농촌진흥청의 흙의 날(311), 여성가족부의 한부모 가족의 날(510), 환경부의 환경의 날(65) 등이 있다.

 

UN이 제정한 국제 기념일도 있다. 국제 여성의 날(38), 국제 인종 차별 철폐의 날(321), 세계 실험동물의 날(424) 등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데이라는 우리나라만의 민간기념일도 많다. 1월부터 12월까지 매달 14일을 각종 기념일로 매겨둘 정도다. 114일 다이어리데이부터 2월 밸런타인데이, 3월 화이트데이, 4월 블랙데이, 5월 로즈데이 ··· 1214일 허그데이까지.

 

게다가 언어유희적 요소를 활용한 기념일도 많다. 삼겹살데이(33), 오이·오리데이(52), 아구데이(59), 육우데이(69), 포도데이(88), 구구데이(닭고기의 날 99), 가래떡데이 혹은 빼빼로데이(1111) 등이 그렇다. 정부, UN, 민간 기념일을 모두 달력에 메모해 둔다면, 그야말로 1년 내내 기념일로 가득찰 것이다.

 

성 발렌티누스와 도마 안중근

214, 1년 중 초콜릿이 가장 많이 팔리는 날. 길거리 가판대마다 꽃으로 예쁘게 포장한 각종 초콜릿이 사람들의 시선을 유혹한다. 평소 마음에 품고 있었던 남성에게 여성들이 용기 내 호감을 표시할 수 있는 기념일 밸런타인데이. 우리나라 ○○데이마케팅의 원조인 밸런타인데이는 어떻게 시작된 걸까? 몇 가지 기원설이 있지만, 역사적 배경으로 가장 설득력 있는 스토리는 로마 황제 클라우디스 2세와 관련돼 있다.

 

클라우디스 2세는 원정을 나가는 병사들에게 금혼령(결혼 금지령)을 내렸다. 병사들이 결혼하면 치열하게 전투에 나서기보다 살아남을 궁리를 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병사들을 측은히 여긴 성 발렌티누스 주교는 황제의 명을 어기고 그들이 혼인할 수 있도록 몰래 도왔다. 이것이 발각되면서 발렌티누스 주교는 270214일 처형당했다. 그런데 214일은 공교롭게도 도마 안중근 의사의 사형 선고일이기도 하다.

 

잘 알려진 대로 안중근 의사는 19091026일 하얼빈역에서 일본의 총리대신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안 의사의 저격은 교전 중에 일어난 사건이어서 국제법적 관점에서 처리돼야 했다. 단순한 살인범이 아니라 전쟁포로로 대우받아야 할 사건이었지만, 안중근 의사는 일본 국내 형법에 따라 1910214일 사형을 선고받고 그로부터 1달여 후에 형이 집행되고 말았다.

 

발렌티누스 주교와 안중근 의사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들은 사랑과 평화 같은 공동체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들을 기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부터 밸런타인데이는 발렌티누스의 희생 의미보다 초콜릿을 주고받아야 하는 날로 기념되고 있고, 314화이트데이라는 급조된 유사 기념일을 출현시키며 하고 있다. 반면, 214일을 안중근 의사의 사형 선고일로 기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특정한 시간의 기억과 계승

어떤 기념일들은, ‘과연 이날이 기념할 만한 날인가라는 의문을 품게 한다. 예컨대 214일 밸런타인데이라는 특정한 시간에 대한 보편적 기억은 남녀 간의 사랑과 성 발렌티누스의 인류애일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초콜릿으로 치환되면서 가치전도가 발생한다. 기억의 주체인 인간과 기억을 공유하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우리는 사라지고 시장을 배회하는 익명의 소비자로 호명될 뿐이다. 이로써 기념일의 본래적 의미는 퇴색되고 만다.

 

기념일이란 매년 반복되는 어떤 것, 또는 매년 무엇인가를 의식적으로 반복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영어로는 ‘anniversary’인데, 라틴어의 ‘annus(1)’‘versus(돌아온)’가 합쳐진 말이다. 독일어로 기념일은 ‘Gedaechtnistag’이라고 하며, 뜻은 문자 그대로 기억(Gedaechtnis)의 날(Tag)’이다. 고대 영어에서 기념일을 뜻했던 ‘mynddæg(마음의 날)’라는 말도 같은 의미로 쓰였다.

 

사람들은 기념일을 맞아 때로는 물리적 공간 속에서, 때로는 반복적 행위나 물건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기억하고, 그 기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사진을 찍고 일기를 쓰고 기록물을 남기며, 제사를 지내고 동상도 세우고 박물관도 건축하는 것처럼. 그러나 이 공간은 물리적인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로또방 같은 욕망의 공간’, 광장이나 온라인 게시판 같은 익명의 공간’, 다락방이나 일기장 같은 고독의 공간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보편적 가치가 스며들어 있는, 특정한 시간을 왜 그리고 어떻게 기념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기억의 공간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알라이다 아스만은 기억의 공간(변학수 외 역, 그린비, 2011)을 통해 한 시대가 당대의 과거에 대해 보유하는 소통적 기억과 달리 문화적 기억의미를 전승한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기억의 공간이란 사회 구성원들에게 중첩적으로 연결된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 속에 공유되는 보편적인 기억으로서, ‘의미의 계승을 위한 정신적 공간이다.

 

기억의 공간을 통해서 특정한 시간을 '마음속에 기록하고 새길[記念] 수' 있으며, 그렇게 새겨진 것을 일정한 기간을 두고 계속 반복해서 꺼내 본다고 해도 그 의미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업적으로 잘 포장된 수많은 ○○데이와 다른 기념일의 힘이다. ‘기억의 공간을 공유해 문화적 기억의 전승으로 성찰할 때 방송대 개교 50주년 기념일도 그 강력한 힘이 발휘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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