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기념하지 않으면 누가 하리!

2022년은「방송통신대법」시행 2년차 면서 방송대 개교 50주년이 되는 해다. 오는 3월 9일 개교기념일에 큰 잔치를 벌여 이날을 기념해야 하는데, 하필이면 이날은 대통령 선거일이라 날짜가 겹친다. 이런 이유로 경남총동문회는 지난 1월 27일 경남지역대학 강당에서 방송대 개교 50주년 기념 행사를 열었다. 류수노 총장님 퇴임 전에 경남지역총동문회가 주관해「방송통신대법」 제정과 개교 50주년을 기념하고 이를 널리 알리고자 하는 취지였다.
나는 창원대 대학원에서 경영전략으로 석사를 마쳤다. 그러나 평생 배우며 공부하자는 마음으로 2008년 행정학과 3학년에 편입하면서 방송대와 인연을 맺었다. 행정학과를 마친 뒤, 청소년교육과, 보건환경학과를 졸업했고, 지금은 농학과 4학년에 재학하면서 복수전공으로 법학을 공부하고 있다. 2010년 경남지역총학생회 제28대 학생회장, 전국총학생회 지역부총학생회장을 역임하면서 방송대 가족으로서 자연스럽게 책임감이 몸에 배게 된 것 같다.
절친한 선배가 “방송대를 생각하면 나는 눈물이 나는데 넌 어떠니?”라고 물어, 나는 “형님! 저도 이제 방송대를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이제 나도 방송대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깊어졌나 보다. 방송대와의 나의 인연도 이제 15년차에 접어들었다. 사람으로 치면 청소년기에 불과한 세월이지만 가슴은 너무나 뜨겁다.
내가 눈물이 난다고 대답한 것은, 지난 몇 년 동안「방송통신대법」 통과를 위해 노력했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갔기 때문이다. 지역구 국회의원과 지역 유지, 방송대 재학생과 동문들에게「방송통신대법」 제정의 필요성을 알리고 동의를 얻기 위해 살았던 지난 세월에 대한 보답인지「방송통신대법」은 국회를 통과했다.
2018년 12월 19일 전국총동문회 임명직 부회장으로서「방송통신대법」 제정 추진단 위원으로 위촉장을 받고, 2019년 2월 16일 경남지역총동문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로부터 4년간 경남지역총동문회는 앞만 보고 달렸다.
「방송통신대법」 제정을 위해 2020년 10월 15일에는 ‘방송대법 제정에 따른 지역대학 발전방안 토론회’를 개최했다. 더불어「방송통신대법」 제정을 촉구하는 릴레이 캠페인을 실시해, 전국에서 유일하게 지역구 국회의원 전원이 공동발의에 서명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2021년 1월 12일「방송통신대법」이 제정되고, 3개월 뒤인 4월 17일에는 경남지역대학 창원시학습관에서 ‘지역대학&지역총동문회 발전을 위한 간담회’도 개최했다.
방송대에서는 앞으로도 매년 개교 기념식뿐만 아니라, 수많은 행사와 다양한 기념일에 대한 ‘의식’을 진행할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 속의 가장 큰 기념일은「방송통신대법」시행 2주년이자 개교 50주년을 맞는, 경남지역총동문회가 주관한 올해의 개교 기념식이다.
지난 2월 11일 서울에서 열리는 ‘방송통신대법 제정의 아버지’ 류수노 총장님의 퇴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했다. 정문에 들어서자 전국총학생회가 붙인 ‘류수노 총장님 더 멋진 곳으로 꽃길만 걸으시고 늘 행복하세요’라는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방송대 가족 모두의 마음을 표현한 글이라 생각한다.
전국의 수많은 대학 총장님들은「방송통신대법」 제정을 이끈 방송대를 부러워하고 놀라워한다. 우리는「방송통신대법」 제정의 의미와 가치를 더 많이 홍보하고 이를 기념하는 데 한 치의 부족함도 없어야 할 것이다.「방송통신대법」 제정에는 방송대 동문들의 땀과 희생이 깊게 배어있음을 기억하고, 이것을 기점으로 해 한 마음으로, 더 큰 미래를 열어가는 초석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가 기억하지 않고 기념하지 않는 날을 누가 기억하고 기념할까?
「방송통신대법」제정, 개교 50주년을 방송대 가족 모두가 기억하고 매년 기념하면서 방송대의 평생교육 가치를 지켜나가야 한다. 이로써 우리는 국가와 사회로부터 더욱 사랑받는 방송대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 그래서 매년 방송대 개교기념일은 방송대의 아름다운 가치와 문화를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이 함께 누리며 기념하는 날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1년 중, 딱 한 번만이라도···
나는 지금으로부터 약 65여 년 전 경북 울릉군 남면 저동에서 태어났다. 내 고향 울릉도는 땅에 비늘이 있어 뱀이 서식하지 못하며 지네가 많다.
어릴 적 어느 날씨 좋은 날, 뒷산에 올라 지네를 잡고 놀다 바다를 내려다보면 수많은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독도가 손에 잡힐 듯했다. 울릉도와 독도에는 품질 좋은 미역, 소라, 전복이 넘쳐나도록 많았고, 집어등(야간에 물고기를 잡을 때 어류를 모여들게 하려고 배에 켜는 등불)을 켜면 바닷물은 보이지 않고 오징어만 보일 정도였다.
어렸을 때는 먹을거리가 부족하다 보니 저동 앞바다 촛대바위 아래서 자주 잠수해 해산물을 잡아 올렸다. 허기가 지면 잠수해서 잡은 전복으로 배를 채웠다. 지금 생각하니 나만큼 전복을 많이 먹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다.
이런 아름다운 고향을 뒤로 하고 나는 육지로 시집 간 누나 집에서 중학교 때부터 얹혀살게 됐다. 이후 손으로 면을 뽑는 ‘수타 기술’을 익히고, 중국음식점을 운영하며 살았지만 울릉도와 독도를 잊은 적은 단 한 순간도 없다.
어릴 때 기억 한 토막이 떠오른다. 1969년 초등학교 5학년 때, 태풍을 피해 저동항에 일본 오징어잡이 어선이 피항 왔다가 떠날 때였다. 식수를 주면 일본산 아지노모토 간장 등을 물값 대신 준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이 물을 제공했다.
그들이 물을 받고 떠나기 전 통역을 맡은 학교 선생님과 동네 어르신들이 ‘빠가야로’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고맙다는 말보다, 독도와 울릉도는 자기네 땅이므로 물도 자기네 것이라는 소리를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어릴 적 영향을 받아 노인이 되고 학생 신분인 지금도 화가 날 때 ‘빠가야로, 빠가야모’ 같은 말을 종종 내뱉는다.
내 외조부 정이관(수송보급대원)과 당숙 정원도(전투2대장)는 독도의용수비대로 활동했다. 특히 외조부 정이관은 당시 67세의 노인이었다. 일본은 한국전쟁 중의 혼란한 상황을 틈타 독도를 불법으로 점령하려 했다. 이 시기 동안 일본으로부터 독도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독도의용수비대 덕분이다. 독도의용수비대는 울릉도 주민 33명으로 구성된 조직으로, 1953년 4월 20일 독도에 상륙해 1956년 12월 30일 경찰에게 수비 업무와 장비 전부를 인계할 때까지 독도를 일본으로부터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10월 25일은 독도의 날이다. 독도가 내 고향이어서가 아니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생각뿐만 아니라 자신을 희생하면서 국토의 일부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선조들의 정신과 태도를 생각하고 돌아보는 날이 되면 좋겠다.
만약 훗날 똑같이 다른 나라에 우리의 영토 일부를 빼앗기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매일매일 기념하는 마음으로 살지는 못해도, 1년에 딱 한 번만이라도 독도의 날에 독도를 지키기 위해 애썼던 조상들을 기억하길 바란다. 개인적으로 하나의 바람이 있다면, 일 년에 단 한번 만이라도 수상보트나 배를 가진 분들이 직접 배를 몰고 독도를 직접 방문해도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