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기념일의 힘

대한민국 정부는 19971121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고 1997123일부터 IMF 관리체제에 들어갔다. 30대 대기업 중 절반이 무너지고, 그렇게 믿었던 은행들이 파산했다. 2만 개의 기업이 도산하고 170만 명이 실업자가 됐다.

 

한국 경제의 30%가 해외자본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 노동시장 유연화가 요구되고 정규직·비정규직으로 노동의 가치가 갈렸다. 경제적 가정해체가 곳곳에서 나타나 소년소녀가장, 조손 세대, 한부모 세대 등의 사각지대 위기가구가 증가했다.

 

19981~3월 석 달간 2288명이 자살했다. 하루 평균 25.4, 같은 기간의 교통사고 사망자 238명을 앞지르는 사상 유례없는 절망사(絶望死). 모든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이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국민들을 보호한다는 국민국가로서 대한민국의 허상이 여실히 드러났음에도 나라를 살리자는 국민들의 노력은 금모으기운동으로 이어져 그 결과 국가 부채액 195억달러 중 182천만 달러를 충당했다.

 

IMF 직후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인사에서 울먹이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는고통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잘못은 지도층이 저지르고 고통은 죄 없는 국민이 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 한없는 울분이 납니다.”

 

바로 이 시기에 한국 사회의 빈곤과 불평등의 심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핵심 원인은 사회안전망이 매우 미흡했기 때문이다. 복지는 시혜와 자선이라는 왜곡된 인식이 지배적이었고, 나라님도 못 구하는 가난한 생활보호대상자들에게 동사무소에서 그저 먹을 것만 주면 됐다. 시민사회와 학계는 새로운 시스템의 필요성을 강하게 제시했다.

 

시혜적 관점의 자선 방식을 권리적 관점의 사회권 방식으로, 협소한 복지정책을 포괄적 사회정책으로 전환할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전면적인 법 개정을 요구하고 법의 정신에 담아야 할 사회적 가치체계의 전환을 요청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제정추진연대회의가 구성돼 출범했다. 시민사회와 학계, 뜻있는 정치권이 법 제정을 위해 연대의 정신을 발휘했지만 큰 난관에 봉착했다.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의 반대는 정치적 견해 차이로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정부 당국인 복지부조차 반대하며 절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제정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고, 당시 법제정을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나의 은사이신 지도교수님이 가끔 그때를 회상하신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결실을 맺게 된 결정적 계기는 김대중 대통령의 울산 발언이었다.

 

1999621일 김대중 대통령이 울산에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중산층과 서민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겠다라고 말하면서, 국민기초생활보장기본법을 만들어 국민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국가가 대책을 세울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비로소 복지부의 행정 관료들이 정책 노선을 급선회하게 됐다.

 

199997, (빈민인 생보자에게만 자선과 시혜가 주어지던 국가의 은혜가) 권리와 연대로 인간다운 시민으로서 사회권자인 국민에게 정부의 의무로 규정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제정됐다. ‘국민이 당연히 누려야 할 법적 권리라는 개념이 도입된,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날이다. ‘97, 사회복지의 날은 완결된 날이 아닌 시작의 날이다.

 

절대적 빈곤이든 상대적 빈곤이든 시장임금 양극화, 노동시장 이중화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는 시민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의료와 보육 등의 공공서비스를 비롯해 국민연금과 고용보험을 비롯한 사회보험체계 등 공적사회안전망에 대한 시장의 반격은 끈질기고 강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한국 사회 저변에 사회복지는 자원봉사와 후원의 선한 마음으로 좋은 일을 하는 것으로 각인된 사회적 인식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제정된 97일이 사회복지의 날로 정해진 이유는 명확하다. ‘시혜의 대상인 빈민으로서가 아닌, 권리의 주체인 시민으로서사회권을 보장하기 위한 국가의 역할을 명시적으로 규정하기 위한 것이다. 나와 가족, 공동체의 안전과 행복이 나이, 성별, 학력, 신체, 재산 등의 차이/기준으로 차별받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 가자는 것이 ‘97, 사회복지의 날이 지닌 진정한 의미이고, 그날을 만들어낸 주역들이 기념하고자 하는 시대적·역사적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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