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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모삼천지교’는 자식을 위한 엄마의 실천이다. 나는 자식을 위해 무엇을 했던가. 만삭의 몸으로 아픈 아이를 업은 채 노점에서 과일 채소 장사를 했다. 아이는 총명하고 영특했다. 장애인 형을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당당하게 손을 잡고 다녔다. 그 아이가 희망이었기에 고단한 삶이었지만, 더 열심히 살았다.

 

업종 변경을 한 일이 순탄하지 않아, 두 아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나는 오일장을 다니며 장사했다. 저녁 식사를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면서 아이들의 몸은 서서히 비만으로 변해갔다. 작은아이는 학교에서 놀림을 받으며 왕따가 됐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삶이 급급해서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성장통쯤으로 여겼다.

 

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큰아이는 노란 버스를 타고 다녔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오는 길에 동생은 형과 마주하는 날이 종종 많았단다. 외면했단다. 친구들이 제 형인 줄도 모르고 바보라고 놀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좋아했던 형이 부끄러운 존재로 느끼게 된 시기였다. 느닷없이 “형이 집을 나가버렸으면 좋겠다”라며 더 극한의 말을 이어가는 날이 많아졌다. 그렇게 왕따의 시간은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 이어졌다.

 

중학교 2학년 2학기가 되면서 학원을 가지 않겠다고 했다. 방문을 걸었다. 중2병이었을까. 아이는 점점 세상과의 소통이 줄어져 가고 SNS의 시간을 늘려갔다. 상위권을 유지하던 성적이 중위권으로 밀려났다. 친구들과 함께 가야 하는 집 근처 고등학교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집에서 먼 거리에 있는 특성화고로 진학했다. 새로운 친구들과 잘 적응하는 것 같았지만 그렇지 못했다.

 

졸업을 앞두고 공장에 취업하겠다고 했다. 나는 대학 진학을 바랐다. 잘할 수 있느냐는 말에 “6년 동안 당한 왕따도 견뎠는데, 그보다 더 힘들겠어요”라는 말을 툭 던졌다. 내가 가볍게 생각한 성장통이 너무 컸나 보다. 4년을 성실하게 일하고 퇴사했다. 날마다 운동으로 살을 빼고 몸을 만들어갔다. 대학 진학의 말은 하고 싶어도 틈을 내주지 않아 하지도 못했다.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날마다 방문을 잠그고 2년을 또 보냈다. 문밖에서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은 애를 태우는 일뿐이었다.

 

나는 공부에 한이 맺힌 채 살았다. 14세에 공장일을 시작했을 정도로 늘 가난의 연속이었다. 검정고시로 학위를 취득한 후, 대학의 꿈은 가슴에 품은 채 살아야 했다. 가난이 대를 이을까 걱정했다. 동굴 속에 가둔 저 아이의 긴 세월과 맞바꾼 건 마이너스 통장이라 해야 할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 아이에게 해 준 게 아무것도 없는 엄마였다. 힘든 상황에서도 나는 공부의 한을 풀려고 방송대 국어국문학과에 도전했다. 내가 공부를 하겠다고 했을 때 남편과 아들은 “조금 하다가 그만두겠지”라고 했다. 나는 아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길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어느새 4학년이 됐다. 얼마 전, 아들의 말이다. “엄마, 방송대는 하루에 몇 시간씩 공부합니까?” “시간 나는 대로 차근차근 공부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라고 했다. 아들은 드디어 닫힌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오겠단다. 그 아들이 방송대 컴퓨터학과에 등록했다. 이것보다 더 큰 기쁨이 또 있을까. 나는 하버드대도 부럽지 않다. 학습관 구경도 하고, 서류를 제출하고 나오는 아들의 모습은 지금껏 볼 수 없었던 표정이다. 방송대는 우리의 빛이다. 나의 아들을 살렸다. 함께 공부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콩닥거린다. 맹자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이사를 했지만, 나는 자식의 거울이 되기 위해 대학생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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