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OU광장   강성남의 그노시스

지옥에는 세 개의 문이 있다고 한다. 음욕과 분노 그리고 탐욕의 문이다.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에 나오는 말이다. 지옥은 영혼 파괴를 은유한다. 분노와 절망은 거꾸로 잡은 칼이다. 그것은 나를 상처 낼 뿐이다.


2000년 전 로마 철인 세네카는 『화에 대하여』에서 화의 핵심은 ‘난 잘못한 게 없다’라고 했다. 화의 원인이 네 탓이란 말이다. 분노가 갈등의 순환고리를 형성하는 이유다.


한국 사회에서도 여러 가지 좌절감이 증폭되면서 분노라는 단어가 파생했다. 사회 곳곳에 분노가 자리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다. ‘길 위의 분노’로 선량한 시민이 희생된다. 무례한 우산 사용에서 옆 사람에게 빗물을 튀기는 것에 짜증내는 ‘우천 분노’는 어떤가? 가끔 지하철 등에서 연장자들을 무시하거나 불손하게 대할 때 폭발하는 ‘노인성 분노’도 심심치 않게 본다. 줄 서서 기다리는 것에서 나오는 ‘지체 분노’, 저지방 다이어트로 기분이 가라앉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저지방 분노’도 있다. 성공한 사람에 대해 이유 없이 분노하는 ‘성공 분노’, ‘고객 서비스 분노’ 등 휴화산처럼 잠복한 분노의 불씨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분노를 일으키는 진원을
제거하려는 노력을 성공시키기
위한 전술로써 분노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요즘 젊은 세대의 분노는
바로 이러한 맥락을 가지고 있는

 ‘현명한 분노’다.

 


정치 사회적인 의미를 증폭시키는 분노의 대상은 권위주의, 엘리트주의, 귀족주의, 수퍼 갑(특권의식)이다. 여기에 분노가 수렴되고 있는 건 세계적 현상이다. 개, 까마귀, 코끼리도 불평등 감각을 지녔다고 한다. 미국 에모리대 영장류 연구팀이 밝힌 바다. 불평등 차별 금지법이 발달했다는 선진국에서도 분노는 여전히 활화산처럼 솟구친다. 몸보다는 마음이 아픈 게 더 큰 문제다.


제20대 대통령 선거 결과에 대한 평가에서는 후보들에 의한 세대와 세대 간의 분노 관리가 승패의 요인으로 거론됐다. 특히 20대 여성은 이른바 꼴통 보수와 기성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인지에 민감하기 때문에 성폭행, 조폭, 데이트 살인 문제에 경악했다는 건 당연하다. 20대 여성이 자주 방문하는 5대 커뮤니티에서는 성인지 관련 주제가 주로 다뤄진다. 회원수가 약 300만 명이라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활동가이자 비평가인 소라야 시멀리가 『우리의 분노는 길을 만든다』(류기일 옮김, 문학동네, 2022)에서 지적한 바에 따르면, 이 세상은 도저히 분노하지 않고선 배길 수 없는 수많은 일을 여성들에게 잔뜩 안겨주면서도 정작 그들이 분노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남성에겐 분노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더 나아가 장려할 만한 것으로 허용되지만, 여성에겐 그렇지 않다고 지적한다. 남성이 남성성이라는 망토의 보호 아래 분노를 거리낌없이 표출하는 동안 여성은 자신보다는 주변의 감정과 필요를 우선시하고 이에 우호적이고 협조적일 것을 일관되게 요구받는다. 젠더 규범이 요구하는 여성성은 분노를 슬픔으로 전환하도록 만든다고 지적한다.

 
『성경』에서는 구약(잠언 14:17. 시편 145:8)에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이란 구절에서 ‘노하기를 더디 한다’는 문장이 히브리어로 ‘긴 코(long nostril)’를 가졌다고 표현하고 있다. 히브리어로 화는 코와 같은 의미다. 콧구멍이 길면 화를 내뿜는 데 시간이 걸려서 그런지 모른다. 따라서 쉽게 화를 내는 건 콧구멍이 짧아서라는 의미다.


콧구멍은 두 개가 번갈아 가면서 서너 시간마다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이를 비주기(鼻週期)라고 부르는데, 비주기는 자율신경계가 통제한다. 코점막이 수축하면 콧구멍이 넓어져서 이쪽으로 숨 쉬고 다른 쪽은 쉰다. 호흡법이 분노 조절에 도움이 된다는 뜻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분노가 우리를 찾아오지만, 그보다 우리가 분노를 찾아가는 일이 흔하다. 잘못된 의심을 품거나 하찮은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거나 말이다. 분노를 불러들이지 않는 것이 현명한 처사다. 누구도 행위자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오로지 행위 자체를 평가한다. 출렁이는 물결 위에서 사물을 정확히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분노에 사로잡히면 우리의 의무를 잊고 선행을 놓친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누군가로부터 뺨을 맞았을 때 이렇게 말했다. “투구를 쓰고 외출할 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음을 한탄한다.” 불의가 언제 발생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참을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객관적인 분노 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포기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분노를 일으키는 진원을 제거하려는 노력을 성공시키기 위한 전술로써 분노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요즘 젊은 세대의 분노는 바로 이러한 맥락을 가지고 있는 ‘현명한 분노’다.


에스키모인은 화가 나면 무작정 걷는다고 한다. 10분 걸으면 현재를 ‘새겨볼’ 수 있다. 20분 걸으면 과거를 ‘돌아보면서’ 묵은 마음의 때가 사라진다. 30분 걸으면 미래를 ‘바라보게’ 된다. 분노의 지옥문으로 들어가지 않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정년퇴직한 선배 교수를 따라 나도 걷고 있다.

 

방송대 명예교수·행정학


1좋아요 URL복사 공유
현재 댓글 0
댓글쓰기
0/300

사람과 삶

영상으로 보는 KNOU

  • banner01
  • banner01
  • banner01
  • banner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