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식물성의 사유로 읽어낸 역사 속의 여성

 “거룩하신 주여, 이 몸은 주님을 위하여 바치나이다. 여호와여, 이 몸은 남을 위하여, 형제를 위하여 일하겠나이다. 여호와여,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일하여도 의를 위하여 일하옵고, 죽어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게 하소서.”  -최용신,「새벽종 소리에 따라 올리는 기도」(1929.4.2.), 『샘골 사람들, 최용신을 말하다』중에서  샘골 사람들을 울린 어떤 장례식일제강점기였던 1935년 1월 25일 경기도 수원 샘골 마을에서는 26세로 생을 마친 한 가녀린 여성의 장례가 치러졌다. 이 장례는 사회장으로 진행됐다. 목사와 전도사, YWCA 관계자, 동네 유지, 그리고 아이들을 포함한 온 마을 사람들이 모였다. 동네 꼬마였던 제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그 때 장례 모습은, 이거는 확실한 내 기억이에요. 젊은이들이 상여 메고, 어린이들은 멜 수가 없잖우. 그래서 양쪽에다가 광목을 길게 매가지구 뒤에서 그 광목을 모두 붙들고, 저기 묘소 쓴 공동묘지까지 따라간 기억이 나요. 나도 잡고 따라갔어요.” 이 여성의 장례가 사회장으로 치러진 것도 특이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눈물의 장례식이 끝난 뒤에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처소로 달려가 유품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녀가 보고 싶을 때 이거라도 보겠다며. 심지어 그녀가 생전에 신던 신발마저도 눈물 젖은 치마폭에 싸가지고 갔다. 26세에 요절한 이 여성은 심훈의 소설『상록수』의 여주인공이었던 채영신의 실제 모델인 최용신(1909~1935)이다. 최용신은 1909년 8월에 함경남도 덕원군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교육자이자 계몽운동가였다. 할아버지 최효준은 일찍이 1890년대 후반에 사립학교를 세웠고, 아버지 최창희와 큰아버지 최중희도 지역의 큰 교육자였다. 그런 가풍 덕분에 그녀 또한 신교육의 수혜를 받았다. 1920년에는 원산의 루씨여자보통학교에 진학했고 덕원지역 계몽운동을 선도하는 두호구락부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훗날 약혼자가 되는 김학준을 만난다. 최용신이 원 산루씨고등여학교(이 학교는 이화학당, 배화학당, 숭의여고, 호수돈여고와 더불어 당대 5대 개신교 학교로 손꼽혔다)를 우등으로 졸업한 기사는〈조선일보〉에 실려 있다. 졸업할 즈음에 그녀는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할 각오를 다진다.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한 여학생졸업 후 서울에 있는 협성여자신학교(지금의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진학했던 1929년, 그녀는 여름방학을 이용해 황해도 수안군 천곡면으로 첫 농촌 실습을 나갔다. 그렇지만 주민들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 경험에 비추어 그녀는 중장기적인 농촌계몽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당시 대한제국을 강점한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소작농들을 토지소유권과 경작권으로부터 완전히 배제시키고 농촌을 빈민촌으로 만들어갔다. 최용신이 삶을 바친 샘골은 수원과 가까웠는데 수원지역의 자작농은 전체 농민의 6%에 불과했다. 또한 산미증식계획에 따른 수탈의 극대화로 농촌경제는 붕괴 직전인 상황이었다. 따라서 최용신이 헌신하기로 다짐한 농촌계몽운동은 한국인을 위한 한국인에 의한 자발적인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192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농촌계몽운동은 언론기관, 종교단체, 중등교육기관이 주체가 됐다. 최용신은 농촌계몽운동이야말로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는 민족운동이라고 생각했다. 최용신은 1931년에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천곡, 샘골이라 불리는 곳에 한국 YWCA의 농촌지도원으로 파견됐다. 최용신 이전에 수원 지역을 담당한 선교사 밀러는 샘골 예배당에 강습소를 만들었다. 최용신의 부임 이후 이 예배당 강습소에 모여드는 아이들이 100여명에 달했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경찰당국은 강습소에 80명 이상은 받을 수 없다고 제재했다. 80명만 남기고 나머지 아이들은 밖으로 내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쫓긴 아이들이 돌아가지 않고 울며불며 예배당 담장에 매달려 넘겨다보는 모습을 본 최용신의 가슴은 온통 쓰려 왔다. 결국 최용신은 본격적인 교육을 위해서는 강습소 건축이 필요함을 체감하고 지역유지들을 설득해 설립인가원을 제출하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지원을 받아 강습소 건축이 시작됐을 때도 직접 지게를 지고 돌과 흙을 날라 반죽을 했다. 이 모습을 본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이후 모든 건축기금이 충당됐다. 다 지어진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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