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현대 명저 106선 해제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1914~1996), 그는 위기와 불확실성의 전환기를 치열하게 살다간 일본의 정치사상가다. 도쿄대 조교수 시절, 제국 일본의 길고 긴 전쟁의 끝자락에 한 명의 병사로 징집돼 천황제 국가의 군국주의 파시즘을 체험하다 패전을 맞이했다. 이후 그는 일본의 유명 잡지 〈세카이(世界)〉 5월호에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라는 원고를 발표하며 일본의 지성계에 혜성같이 등장했다. 당시 일본은 연합국 최고사령관 맥아더의 지휘 하에 도쿄재판이 시작되는 긴박한 시점이었다.

마루야마는 여기에서 사진 출처=ⓒ朝日新聞社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축으로 삼아 광기에 사로잡힌 일본의 국가체계가 어떻게 거대한 ‘무책임의 체계’를 구축했으며, 신민들에게 무한대의 압박을 떠넘기는 이른바 ‘억압 이양(移讓)의 메카니즘’이 어떻게 작동할 수 있었는지를 명쾌하게 드러냈다. “패전 후 반년에 걸친 고뇌 끝에 천황제가 일본인의 자유로운 인격 형성, 즉 자신의 양심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며, 그 결과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는 인간이 되는 데 치명적인 장애로 작용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라고 마루야마는 말한다. 긴 세월 동안 ‘가족국가’ 일본의 구성원이자 황국(皇國) 신민으로 ‘순응’하며 살아온 일본 지식인들의 정신세계에 마루야마가 던지는 메시지는 새로운 각성을 촉구하며 널리 퍼져나갔다.
이후 마루야마는 패전국 일본에 전후민주주의를 심으려는 비판적 지식인이자 오피니언 리더로 살아가는 동시에 일본의 사상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천착해 들어갔다. 그리고 일본의 새로운 사상 전통을 어떻게 드러내며, 책임의식 있고 자유로운 인식주체를 어떻게 형성할 수 있을 지를 필생의 학문적 과제로 삼으며 여러 권의 기념비적인 저서를 내놓게 된다. 필자 역시 마루야마의 책을 접하면서 받은 신선한 충격에 끌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유학을 결심한 바 있으니 개인적으로 그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은 셈이다.
마루야마의 책은 그리 쉽게 읽히는 종류의 글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책은 난해한 만큼이나 따라가다 보면, ‘일본을 보는’ 시선을 넘어, ‘일본이 보는’ 내면의 영역에까지 독자의 사유 지평을 확장시켜준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오에 겐자부로는 마루야마에 대해 “(전후) 일본의 다양한 지식인들에게 ‘공통의 언어’를 제공해주었다”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마루야마는 일본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신적 병리 구조에 메스를 가하려고 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마루야마의 학문은

그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절실하게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기 위해
시대적 한계 위에서 진지하게 고투한
지적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사상』이 그려내는 선율
마루야마의 사상사학의 묘미는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방대한 시선이 디테일한 세계와 결합해 다채로운 선율을 들려준다는 점이다. 파편적으로 이해될 소지가 많은 별개의 사건들을 퍼즐조각처럼 맞춰 전체상을 역동적으로 포착해 보여준다.
『일본의 사상』(1961. 국내에는 1998년 첫 번역)은 마루야마의 다른 저작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벼운 분량의 책이다. 그의 다른 책들이 매우 묵직한 주제를 심층적으로 파고든 반면, 이 책은 자유분방한 형식으로 발표한 네 개의 글을 모아놓았다. 하지만 이 책의 매력을 일본의 역사나 사상사에 생소한 한국의 독자들에게 간명하게 전달하기는 쉽지 않다. 집약된 사유방식과 방대한 역사적 배경을 사상(捨象)시킨 채 내용을 압축하는 순간 마루야마의 복합적이고 유기적인 사유체계가 앙상한 모습으로 형해화될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책 전체를 관통하는 마루야마의 의도를 최소한으로 요약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일본의 경우, 정치문화의 강력한 자기장(磁氣場)이 작동한다. 일본에 유입된 외래 사상이나 제도는 독특한 방식으로 변형되는 과정을 겪었다. 자고로 일본은 새로운 외래 사상에 대해 민감한 감수성과 호기심을 보이면서도, 태고적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전통적 사고방식이 집요하리만치 지속되는 매우 특이한 성향을 보여 왔다. 이런 모순적인 경향성은 메이지 이후 일본 근대화의 과정에서 신민들의 ‘무한책임’과 천황제의 ‘무책임성’ 등으로 이어지며 뒤틀린 양상으로 표출돼 나타난 바 있다.
마루야마는 이러한 문제의 심층에 유럽과 다른 일본문화의 특수성이 자리하고 있다고 보았다. 유럽의 경우 오랜 공통된 문화적 전통 등으로 인해 ‘공통의 인자’로 연결되며 서로 다른 학문, 사상, 예술 분야까지도 활발히 소통하는 반면, 일본의 경우에는 ‘공통의 언어’가 부재한 가운데 개인은 각자가 속한 분야나 영역에 고립돼 있게 되고, 보편적 사유방식으로 성찰하거나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개인이 책임 있고 자유로운 인식을 갖지 못한 채 피해자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일본이 새로이 ‘공통의 언어’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그러려면 구성원들이 다원적이고 비판적 시각을 통해 전체 상황을 조감(鳥瞰)해 나가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기존의 순응 일변도의 수동적인 사고를 넘어서 주체적인 인격체들이 만들어지는 정치적·사회적 환경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새롭게 재구성하려 했던 사상가로서 마루야마의 의도와 고민을 엿볼 수 있다.

마루야마 사유의 기준 혹은 준거 틀
마루야마 정치학의 출발점은 고정화된 기구나 조직이 아니라 변화무쌍한 인간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한다. 그는 정치의 세계가 법이나 경제의 영역에 비해 훨씬 강렬하게 ‘인간의 냄새’가 배어 있지만, 각종 역학 관계 속에서 예측이 어려운 선택을 하는 복잡한 인간을 다루기에 정치학은 인접 학문 분야에 비해 ‘엄밀성’을 결여한 애매한 학문이 되기 쉽고, 아울러 심각하게 ‘비인간적’인 결과로 귀결되는 역설적인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마루야마는 일본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정신적 병리 구조에 메스를 가하려고 했다. 그러려면 어떤 식으로든 사유의 ‘기준’ 혹은 준거의 틀이 필요했는데 마루야마는 그의 사유의 기준을 대체로 ‘근대 유럽’에서 찾으려 했다. 후일 마루야마에게 ‘근대주의자’나 ‘서구중심주의자’, 혹은 또 다른 모습을 한 ‘일본주의자’라는 비판이 나오게 된 경위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러고 보면 한 시대를 풍미한 마루야마의 학문은 그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절실하게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기 위해 시대적 한계 위에서 진지하게 고투한 지적 흔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21세기, 표류하는 일본의 사상
현재 일본정치를 구속하는 구조적 요인들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해보기로 하자. 우선 천황제의 굴레를 지적해야 할 것이다. 천황제의 존속은 일본정치에 금기의 영역이 명료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일본에 근본적인 정치개혁을 상상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두 번째는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은 데서 비롯되는 이른바 과거사문제 즉 역사로부터의 굴레다. 이는 주변국과의 불신과 단절로 이어지며 일본의 아시아 회귀를 어렵게 만든다. 세 번째는 미국으로부터의 구속이다. 이는 국제관계에서 일본의 자율성을 심하게 훼손할 수 있으며 유연한 전략 마련에 제약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구속 요인들은 그동안 여러 면에서 의미 있는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요인들은 19세기 서세동점의 위기 앞에서 ‘개국’을 단행하고 과감한 정치적 실험에 나섰던 일본에는 존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도쿄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주요 저서로『19세기 동아시아 패러다임 변환과 다중거울』,『동아시아 역사학 선언』등이 있다.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재하지 않았던 사항임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파시즘과 그에 따른 논리와 심리’는 마루야마가 줄곧 직시하며 비판했던 역사적 현상이었다. 그가 없는 지금, 일본 열도에서는 극우적 성향이 대세를 이루고 있으며 75년 이상을 지탱해온 ‘평화헌법’은 이제 개정될 위기에 놓여있다. 21세기 일본은 다시 이러한 흐름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대세에 순응하고 말 것인가. 21세기 일본과 동아시아는 어디로 갈 것인가. 거대한 변화를 목전에 두고 마루야마가 떠난 빈자리가 유난히 커 보인다.

 

 

 

 

 

함께 읽을 만한 책

마루야마의 주요 저서들은 김석근에 의해 유려한 한국어로 번역돼 있다. 그중에서도『일본정치사상사연구』(통나무, 1995),『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한길사, 1997),『충성과 반역: 전환기 일본의 정신사적 위상』(나남출판, 1998)과 같은 책은 마루야마 사상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걸작들이다. 이 책들은 일본에 대한 호기심을 넘어 일본의 고뇌하는 지성인의 사유의 숨결까지 전해줄 것이다.
태가트 머피의『일본의 굴레』(윤영수·박경환 옮김, 글항아리, 2021)라는 작품도 추천해둘 만하다. 저자는 교수로서 40년간 일본에서 생활한 사람이다. 외부자적 시각과 내부자적 이해를 균형 있게 겸비한 저자는 ‘현재 일본이 과거의 일본과 어떻게 연결돼 있으며, 과거의 일본이 어떻게 지금의 일본을 구속하고 있는지’를 입체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해 준다.
마지막으로 마루야마를 보면 연상되는 한국의 국제정치학자, 동주 이용희(1917~1997)의 저작을 언급해두고 싶다. 얼마 전 이용희의 책들은 열 권으로 된『동주 이용희 전집』(연암서가, 2018)으로 출간된 바 있다. 마루야마와 이용희는 동시대를 살면서 주변부 지식인으로서 ‘보편과 특수’의 문제를 고민하는 한편 자신이 목도한 내셔널리즘과 국가의 정체성을 고민했다는 점에서 서로 이어져 있다. 자기 역사와 고전문헌을 관통하는 언어능력과 다양한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거시적인 안목과 미시적인 디테일을 종합하는 능력이나 예술적인 감수성을 겸비하고 있다는 점도 닮았다.

하지만 마루야마가 일본학계의 후학들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제시하며 논의의 토대를 제공한 반면 이용희의 국제정치학이나 민족주의 연구는 그 탁월한 안목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충분히 검토되거나 계승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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