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음식과 권력

몇 년 전 방문한 뮌헨 마리엔 광장에서 남사스럽게 깎아 다듬어 진열해 놓은 아스파라거스를 사는 남자의 심리가 나는 궁금했다. 흔히들 크고 단단하면서 물기가 있어야 품질 좋은 아스파라거스라고 말하는데, 그 근저에는 아스파라거스를 단지 몸에 좋은 음식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의 다른 것, 남성의 은밀한 욕망이 자리잡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어떤 면에서 음식은 사람의 원초적 욕망을 담아놓는 그릇이기도 하다. “처음으로 정원의 온실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아스파라거스를 수확했습니다. 이 아스파라거스를 다른 것과 함께 섞지 말고, 혼자만 드십시오. 그래야 아스파라거스에 대한 행복한 추억을 간직하게 될 테니까요. 제가 당신과 함께 이걸 먹는다면 최고로 맛이 있을 텐데. 오늘 점심때는 어떨지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방문해도 좋을까요? 이곳은 여전히 조용합니다. 당신과 헤어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아듀. G.” 루이 14세는 아스파라거스를 ‘채소의 왕’이라고 공포했다. 이집트의 네페르티티 여왕은 ‘신들의 음식’이라고 공언했다. 아스파라거스가 절대 권력자들의 애정과 칭송의 대상이 된 이면에는 일종의 유감주술과 이 채소의 효능에 대한 속설이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괴테도 이 채소를 주제로 편지 썼다1776년 5월, 바이마르에 살던 괴테는 한 여인에게 편지를 쓴다. 일종의 연애편지인데, 흥미로운 것은 아스파라거스를 주제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여인에게 보내는 연서에 왜 아스파라거스를 등장시켰을까? 괴테는 그 이후로도 여러 차례 ‘아스파라거스 연서’를 썼다.22년 후인 1798년 봄, 잠시 바이마르 인근 도시 예나(Jena)에 머물 때 괴테는 바이마르에 있는 아내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에게 이렇게 편지를 쓴다. “내 몸의 영양 상태가 훨씬 좋아졌소. 트라비티우스 부인은 아스파라거스 요리를 아주 잘하고, 가끔은 달걀 케이크도 만들어준다오. 실러의 집에서는 스테이크 요리를 해주고, 당신이 보내준 소스가 샐러드의 맛을 더해 주어 입맛을 되찾았소.”독일의 대문호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749년,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자유 황제 도시였던 프랑크푸르트가 고향이다.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는 서른여덟에 17세 카타리나와 결혼했다. 그의 기념관 괴테 하우스는 아주 큰 집이었다. 가정교사를 여럿 두고 당시의 교양 언어였던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영어 교육을 시킨 것은 물론 댄스, 승마, 펜싱 등도 레슨을 시켰다. 이로 미루어 그는 식량을 사이에 둔 권력관계에서 권력층에 속하는 상류계층 출신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요리에 대해 쓴 짤막한 글들을 『코덱스 로마노프(Codex Romanoff)』라는 소책자에 모아두었다. 이 요리책에서 그는 아스파라거스를 언급했다. “아스파라거스의 가는 줄기를 삶아 소금, 향유, 후추로 맛을 내면 아주 훌륭한 요리가 된다. 이 요리는 부은 위장과 속병을 고쳐주고, 어깨나 허벅지 통증을 없애주며 설사약으로도 효능이 있다.”아이러니하게도 문화는 권력의 호의에 의해 발아하고 생장한다. 대중들의 일상적 삶은 대체로 먹을 것을 구하는 일로 점철돼 있다. 매일 같이 그날그날의 양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유한계층의 관심과 열정, 취미가 문화 형성과 발전의 주요 변수로 작용한다. 음식을 즐기는 행위는 여유와 연관성이 있다. 여유는 일종의 혜택이고 혜택은 권력의 또 다른 이름이다.  ‘아스파라거스 함대’까지 거느린 아우구스투스 황제로마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기원전 63년~기원후 14년)는 세상 곳곳의 아스파라거스를 찾아 로마로 싣고 오는 이른바 ‘아스파라거스 함대’까지 거느리고 있었다. 진시황의 불로초에 대한 집착만큼이나 아스파라거스에 대한 사랑과 집착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는 ‘아스파라거스를 요리할 때보다 더 빠르게’라는 민첩성을 강조하는 표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병약했던 그는 위기가 닥칠 때마다 앓아누웠다. 청년 시절에는 결정적 순간을 회피하거나 달아나는 졸렬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심약하기도 했다. 그에게 아그리파라는 의리남이 없었다면 로마제국은 물론 지중해 세계의 판도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심약했기에 그는 더욱 더 남자다움을 원했을 것이다. 남성성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타인을 지배하고 싶었을 것이다. 다행히 그는 총명하고 근면한 데다 남다른 끈기가 있었다. 용맹해지기 위해 그는 스스로를 단련하고 단련했다. 로마를 유럽의 중심이자 시민정치와 예술의 허브 도시로 만든 사람이 바로 우유부단했던 소심남 아우구스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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