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질병과 세계사

문명은 질병을 낳고 질병은 문명을 만든다. 농경의 시작과 도시의 형성과 더불어 수많은 감염병이 가축화된 야생동물로부터 유입됐다. 막대한 인명이 희생돼 공동체와 사회질서가 무너지기도 했지만, 인류는 감염병에 대한 대처 능력을 키우며 문명을 발달시켰다. 암을 비롯한 비감염성 질환도 개인 차원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문명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사회적인 의미를 획득해왔다. 이처럼 질병과 인류는 단순히 병원체와 숙주라는 생물학적 관계를 넘어 서로 문화 또는 생태 수준의 흥망성쇠를 간섭하는 문명사적 관계를 맺어왔다.

『세계사를 바꾼 전염병 13가지』등을 번역, 소개했던 의사학(醫史學) 연구자인 이규원 박사가 매달 1회 연재하는 이번 기획을 통해 유사 이래 지속된 질병과 인류의 공방 혹은 공생을 생태-환경-의학-사회-문화 횡단적으로 탐색하며 질병과 그에 대한 대처가 세계사의 강한 추동력이었음을 그려내고 역사의 주체가 숙명적으로 ‘앓는’ 생명체로서의 인간임을 상기시키려고 한다. 또한 질병과 인간의 관계-맺기에서 파생되는 윤리적인 문제를 드러내어 질병의 세계사가 현재와 미래에 함의하는 바를 짚고자 한다.

연재 순서
01. 프롤로그: 질병과 인류
02. 고대의 역병: 로마의 몰락과 나라(奈良)의 대불(大佛)
03. 흑사병과 중세 유럽: 해상 검역과 도시 봉쇄
04. 두창과 콜럼버스의 교환
05. 예방과 리스크: 최초의 백신을 둘러싼 논쟁
06. 은밀한 질병, 매독의 세계화와 사회사
07. 자연재해와 질병/낙인
08. 유방암과 최초의 전신마취 수술
09. 산욕열과 소독법: 손 씻기의 문화사
10. 콜레라의 세계사: 제국주의와 감염병
11. 공중위생의 탄생과 동아시아의 근대화

12. 각기 논쟁과 군인의 대량사: 감염이냐 영양이냐
13. 1907년 한국의 콜레라 유행과 식민지 방역 체계의 형성
14. 스페인독감과 마스크의 문화사
15. ‘불결한’ 요리사: 장티푸스와 무증상 보균자의 발견
16. ‘전염병 도시’ 경성의 우울
17. 전쟁의 비극과 말라리아의 공포
18. 마늘에 소주?: 감염병 ‘민간요법’의 문화사
19. 생체실험과 바이오테러의 근현대사
20. 에필로그: 코로나19, 감염병의 현재와 미래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이전에 생물학적 존재다. 저마다 앓는 신체라는 원죄를 짊어지고 태어나 불가역적인 시간을 살아간다. 인간의 신체는 필연적으로 질병이라는 관념을 배태하고 구현하는 장(場)이며, 한 인간의 역사는 곧 병력(病歷)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를 넘어선 사회적 존재다. 사회적 공간에서 개개인의 질병은 의미를 획득하고 문제시되고 보편화한다. 그 결과 의학이 탄생하고 사회 구조가 변화한다. 인간의 생물학적인 측면이 질병의 원인을 제공한다면, 인간의 사회적인 측면은 질병의 조건을 구성한다. 요컨대 인류의 역사는 질병과 치유의 역사로 대변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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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을 둘러싼 역사가 세계의 역사를

가장 대표적으로 그려내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의 주체가 숙명적으로 ‘앓는’ 인간임을 상기한다면,

질병은 인류의 역사를 보다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데 유효한 것은 틀림없다

 

문명이 낳은 감염병, 감염병이 만든 문명
다양한 유형의 질병 가운데 인류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은 감염병이었다. 감염병은 역사상 가장 많은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병원체에 감염된 인간이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거나 오랜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도 문제지만, 감염병(전염병)의 본질적인 특성은 무엇보다 인간에게서 인간으로 퍼져나간다는 데 있다. 인간 집단에 작용하기 때문에 한 사회, 나아가 하나의 문명까지 위협받을 수 있으며, 가장 긴밀한 소통, 가장 활발한 사회활동이 도리어 가장 위험한 행위로 역전된다. 감염병의 발생과 유행은 인과성이 아닌 우연성의 지배를 받는다. 언제 누구에게 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공포에 휩싸이고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사회성의 근간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사회성 뒤에 억압돼 있던 인간의 본능적인 심리가 드러난다. 혐오와 차별, 낙인찍기와 희생양 찾기. 감염병의 대유행을 비롯한 통제 불능의 재해 상황이 집단 폭력과 학살로 이어진 사례는 숱하다. 감염병은 인간의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도 파고드는 것이다. 그러나 불안은 변화와 창조의 원천이기도 하다. 인류는 반복되는 참상과 상실을 딛고 감염병에 대응할 방법을 모색해왔다. 페스트(흑사병)의 창궐에 맞서 검역, 격리, 도시 봉쇄를 실시했고, 두창(천연두)의 위협을 차단하고자 백신 접종을 고안해냈다. 이처럼 인류는 유사 이래 신의 영역에 속했던 방역이라는 기술을 거머쥐고 근대를 열어젖힐 수 있었다.
감염병은 외부의 병원체가 인체에 침입함으로써 성립하므로 인간의 생활환경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약 1만1∼2천년 전, 인류가 농경을 시작하고 야생동물을 가축화한 시점부터 감염병의 본격적인 침투가 이뤄졌다. 정주 생활을 통해 분변 매개 기생충 감염병과 수인성(水因性) 소화기 감염병이 증가했고, 가축화된 동물로부터 두창, 홍역, 인플루엔자를 비롯한 다양한 신종 감염병이 유입됐다. 약 5천년 전, 메소포타미아를 위시해 문명이 탄생하고 도시가 출현했다. 소규모 인구 집단에서는 감염병의 유행이 지속되지 않지만, 일정 규모의 인구를 갖춘 도시에서는 유행이 반복적으로 초래된다. 사회가 타격을 입고 재생하는 과정이 되풀이되면 감염병이 토착화해 문명 고유의 레퍼토리를 형성한다.
인류는 문명을 발흥시킨사진 출처=위키피디아 이래 끊임없이 문명을 확장하고 생태계에 개입하며 크고 작은 감염병의 유행에 시달려왔다. 교통망과 항해술이 발달하고 교역과 전쟁이 거듭되며 문명 사이에, 그리고 대륙 사이에 감염병의 교환이 이뤄졌다. 특정 지역의 풍토병(endemic)이 유행병(epidemic)과 팬데믹(pandemic)으로 확대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고, 산업혁명, 열강의 식민 지배,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감염병의 유행 기반이 확고해졌다. 결국 감염병이 길러낸 근대성은 또 다른 감염병의 위기를 불러왔다. 인류는 콜레라의 포화에 휩싸이며 근대적 공중위생을 제도화했고, 1918년 인플루엔자(스페인독감)의 맹위를 체감하며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했다.
이처럼 문명은 감염병을 낳고 감염병은 문명을 빚는다. 그리고 근대는 이러한 순환 고리를 한층 강화하고 가속화한다. 21세기는 가히 감염병의 시대가 됐다.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감염병 유행의 조건을 더욱 충족했고, 항공 산업이 발달해 전 지구적 확산의 기회가 증대했다. 공장식 밀집 축산이 횡행하고 생태계가 파괴돼 야생동물에서 유래하는 신종 감염병의 출현 가능성이 커졌고, 기후변화로 인해 병원체 폭증과 다양화의 위험성이 높아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거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팬데믹은 차라리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보인다. 인류에게는 방역과 의학이라는 무기가 있지만, 병원체는 늘 한발 앞서 행동하며, 지금까지 보고된 인간 병원체는 1천500종을 헤아린다.
지구상의 한 종(種)에 불과한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환경을 마음대로 변형시키며 ‘인류세(Anthropocene)’를 열고 ‘6번째 대멸종’을 초래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에 의해 교란된 환경에서는 동물 유래 신종 감염병의 병원체를 보유하는 숙주, 특히 박쥐목, 설치목, 참새목이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게다가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다양한 모기 매개 감염병이 고위도 지역으로 북상하고 포유류 사이에서 바이러스의 새로운 종간 전파가 크게 활성화될 전망이다. 결국 인류는 미증유의 ‘팬데믹세(Pandemicene)’를 창조해 자신을 옥죄는 형국에 놓여 있다. 기후변화 억제와 질병 감시를 위한 국제 공조가 무엇보다 절실한 지금, 그러나 인류가 선택한 것은 전쟁과 고립이다.

비감염성 질환도 사회변화 유도
사짖 출처=위키피디아그렇지만 감염병만이 인류의 역사를 움직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다른 한편으로 비감염성 질환의 시대를 살고 있다. 한국인의 사망원인 가운데 압도적 1위는 암이고 그 뒤를 심장질환이 잇고 있다. 전 세계 사망자의 4분의 3이 비감염성 질환에 의한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영양 및 위생 상태의 개선과 의료의 발달 덕택에 감염병 사망률이 낮아지고 평균수명이 늘어난 결과라 해석될 수 있다. 비감염성 질환의 발생은 흡연이나 음주 같은 생활 습관과 내재적인 요인에 좌우되는 측면이 있지만, 개인 차원의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문화, 보건 정책, 환경오염을 비롯한 거시적인 요소에 조응하고 문명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사회 변화의 원동력이 돼왔기 때문이다.
감염병이 생존의 문제를 제기한다면, 비감염성 질환은 건강의 문제를 환기한다. 그런데 질병이 없는 상태가 곧 건강을 뜻하지는 않는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정의했듯이 건강은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안녕을 적극적으로 포괄하는 개념이다. 질병을 근절하기 위한 노력만으로는 건강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때 의학과 자연과학은 충분조건이 아닌 필요조건이 되며, 그 옆의 빈자리는 인문학, 사회과학, 문화예술 등으로 채워진다. 또한 위생과 더불어 양생(養生)이 다시금 부상한다. 질병을 둘러싼 역사가 세계의 역사를 가장 대표적으로 그려내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의 주체가 숙명적으로 ‘앓는’ 인간임을 상기한다면, 질병은 인류의 역사를 보다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데 유효한 것은 틀림없다.
질병과 인류는 단순한 생물학적 관계를 넘어 서로 문명 내지는 생태 수준의 흥망성쇠를 간섭하는 문명사적 관계를 맺어왔다. 이 연재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기획했다. 유사 이래 계속돼온 질병과 인류의 공방을 생태-환경-의학-사회-문화 횡단적으로 탐색함으로써 질병과 그에 대한 대처가 세계사의 강한 추동력이었음서울대 의과대학 인문의학교실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에는『2023 대한민국 대전망』(공저) 등이, 옮긴 책으로는『정의의 아이디어』『세계사를 바꾼 전염병 13가지』등이 있다.을 그려내려고 한다. 또한 질병과 인간의 관계 맺기에서 파생되는 윤리적인 문제를 드러냄으로써 질병의 세계사가 현재와 미래에 함의하는 바를 짚으려고 한다.

최근 몇 년간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몸소 겪고 목격했다. 만연하는 질병 앞에서 인간의 심리와 반응은 본질적으로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질병에의 대처법 역시 큰 틀에서는 상당 부분 과거의 반복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중대한 전환기를 맞이한 인류가 가장 의지해야 할 곳은 두말할 나위 없이 역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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