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식물성의 사유로 읽어낸 역사 속의 여성

“우리 조선부녀를 현재 봉건적 노예제도하에 속박하고 있는 것도 일본 제국주의이며 또 우리들을 민족적으로 박해하고 있는 것도 일본 제국주의이다. 우리들이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지 않고서는 우리 부녀는 봉건제도의 속박, 식민지적 박해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 또 일본 제국주의가 타도된다 하더라도 조선의 혁명이 정치·경제·사회 등 각 방면에서의 진정한 자유와 평등이 아니라면 우리 부녀는 철저한 해방은 얻지 못한다.” ―강대민 지음, 『여성조선의용군 박차정 의사』(2004), 「민혁당 남경조선부인회 창립선언문」 중에서  남편의 손에 실려 온 조국 땅대한민국의 광복의 함성이 울려 퍼진 해, 젊고 작은 여성의 시신이 중국을 떠나 고향으로 향했다. 그리던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4년에 34세로 눈감은 여성독립군 장군 박차정의 유해다. 그녀는 의열단 단장인 남편 김원봉 장군의 손으로 남편의 고향인 밀양 감천동 뒷산에 묻혔다. 박차정은 얼어버린 굳은 땅을 뚫고 피어난 복수초(福壽草)의 인생을 살았다. 눈 속에 피어나는 노란색 복수초는 꽃부터 피우고는 잎을 내는데, 산길을 가던 사람이 꽃 주변의 눈이 녹은 것이 신기해 손을 대었다가는 맹독에 노출돼 혼쭐이 난다. 박차정(朴次貞, 1910.5.7.∼1944.5.27)은 일본 제국주의의 한기에 온 산천이 얼어붙고 몸과 마음마저 굳어버린 어둡고 추웠던 1910년 5월에 경남 동래에서 3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밀양 박씨 박용한은 동래 개양학교와 서울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개화 인사였다. 그는 순종 때 탁지부 주사로 측량기사 일을 했는데, 망국을 애통해하여 1918년 1월에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우국지사다. 박차정이 아홉 살 때의 일이다. 어머니 김맹련은 남편의 순국 후 가족 모두를 동래성결교회에 출석교인으로 등록시키고 신앙으로 마음을 다지며 남은 자녀들을 홀로 키워냈다. 독립운동 가풍 속에서 성장측량기사였던 아버지가 나라의 패망을 견디지 못하고 순국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박차정의 집안에는 독립운동의 가풍이 흐르고 있었다. 외가 쪽으로는 어머니가 독립운동가 김두봉과 사촌이었다. 첫째 오빠 문희, 둘째 오빠 문호도 독립운동에 몸 바쳤다. 첫째 오빠 문희는 동래사립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후 동맹휴학을 주도했고, 경성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 활동을 하면서 항일사상운동에 매진했다. 이후 니혼대(日本大) 경제과 2학년을 수료하고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고, 의열단 단원으로 일하다 체포돼 2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둘째 오빠 문호 또한 신간회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 활동을 했다. 그는 일제에 의해 체포돼 1934년에 후사도 없이 서대문경찰서에서 옥사했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를 따라 자연스럽게 박차정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다(2019년 11월 17일 부산보훈청은 부산시민회관 소극장에서 열린 ‘제80회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에서 지역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 의사의 둘째 오빠인 고 박문호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이로써 박차정 의사와 첫째 오빠 박문희 선생에 이어 한 집안에서 세 번째 독립유공자가 나왔다).박차정은 둘째 오빠 박문호의 권유로 1930년 베이징으로 건너가 의열단에 합류한다. 이전까지의 독립운동이 주로 국내에서의 학생운동이었다면, 이후부터는 총 들고 전선을 누비는 강인한 여성 군인으로서의 활약이 펼쳐진다. 얼어붙은 땅에서 힘을 키우던 꽃이 드디어 피어나는 때가 온 것이다. 박차정은 1924년에 벌써 동래기독교소년회에 가입해 외오촌당숙인 박일형과 함께 활동했다. 1929년에는 부산지역 여성 교육의 산실이며 항일여성운동 선도 구심체인 동래일신여학교 고등과를 졸업했다. 이 학교는 호주 장로교 선교부가 세운 학교였다. 재학 당시 박차정은 교지 <일신(日新)> 2집에 자전적 단편소설「철야」를 게재했는데, 그 내용은 민족의 고난을 상징하면서 해방의 굳은 의지를 다진 것이었다. 시「개구리 소래」와 수필 「흐르는 세월」등을 통해 또래 소녀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우려고도 했다. 이후 여학교를 졸업하면서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된 박차정은 사회주의 단체인 근우회 동래지회 대의원, 중앙집행위원회 중앙상무위원으로 활동하며 여학생들의 시위운동을 지도해 12월에 일어난 만세시위행진을 주도한다. 이 일로 일제에 체포됐다가 풀려난 후, 이듬해인 1930년 1월, 이화·숙명·배화·동덕여고보 등 11개 여학교의 시위를 주동하다가 두 번째로 검거되고 세 번이나 모진 심문을 당했다. 2월에 석방됐지만 고문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돼 평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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