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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방송대 50주년을 맞아 기념책자도 만들고 앞으로 50년을 전망했다. 함께 기뻐하면서 명색이 역사 전공자로서 뭔가 한 마디 보태고 싶었다. 개교 51주년을 맞아 다시 그 생각이 떠올랐다. 가령 방송대 50년을 넘어서 방송대 이전의 역사 50년(또는 그 너머까지)을 찾아보면 어떨까? 방송대를 둘러싼 시간, 공간이 앞뒤로 좀더 확장되지 않을까? 왜냐하면 방송대가 뿌리깊은 전사(前史)를 가진 학교라면 뻗어나갈 줄기도 더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방송대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은 어쩌면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공간에 처음 세워진 교육기관은 ‘공업전습소’였다. 생소한 이 이름의 기관이 우리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한말 근대국가를 형성하려는 노력은 농상공 분야의 새로운 학교를 세우려 했고, 그것이 분화되면서 그 가운데 공업부분을 담당하는 학교가 세워졌던 것이다. 당시로 봐서는 가장 급한 분야였다. 일제는 ‘전습소’라는 이름으로 급을 낮췄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기에 여기서 공업학교, 고등공업학교(전문학교)가 다시 배태됐고, 이웃에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면서 이공학부도 만들어졌다.


전습소는 한말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렇게 공업학교의 체계가 잡히는 시기는 대략 50년의 범주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저널리스트로 유명한 리영희 선생이 이곳 공업학교가 밖으로 이전해서 만들어진 ‘경성공립공업학교’를 1940년대에 다녔는데, 학생들의 수준이 매우 높았고 사회적으로 좋은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요즘 실업계 학교를 낮춰보는 것과는 매우 다른 양상이었다.

 

가령 방송대 50년을 넘어서

방송대 이전의 역사 50년(또는 그 너머까지)을

찾아보면 어떨까? 방송대를 둘러싼 시간, 공간이

앞뒤로 좀더 확장되지 않을까?

왜냐하면 방송대가 뿌리깊은 전사(前史)를 가진 학교라면

뻗어나갈 줄기도 더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공간으로 본다면 현재 목조건물 한 채만 남아있지만, 현재 방송대 공간 거의 전부가 예전 공업전습소와 이후 배태됐던 공업학교, 고등공업학교, 그리고 기숙사, 관사 등으로 채워져 있었다(초기의 공업전습소는 부지면적이 1만2천746평 상당으로 매우 큰 규모의 학교였다. 본관과 관리동 이외에도 7개의 실습동과 부속 실습장, 공장, 기숙사, 관사 등이 건립돼 있었다).


여기서 성장해 공업 부문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의 배출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안동혁 박사는 고등공업학교를 나와서 이곳(경성고등공업학교) 화학과 교수를 지냈고, 해방 후에는 이곳에 설치한 중앙공업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자신이 가진 역사사료를 방송대에 내놓은 것도 자신이 평생 몸바쳤던 공간을 방송대가 이어받았다는 기억 때문일 것이다. 건축가이자 시인이었던 이상(李箱)도 여기 출신이며(방송대가 초기에 사용했던 건물도 그가 설계했다는 말이 있다), 양근환은 1921년 친일파 민원식을 저격하는 저항운동을 하기도 했다.


공간이 넓었기에 한때는 서울 문리대에 일부 공간을 빌려주기도 했다. 해양학과 출신 한 분은 자신들이 옛 방송대 본관이 세워지기 이전 그 공간에서 공부를 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해양학과 이전에는 화학과에서 사용했는데, 그 이유는 거슬러 올라가면 이곳이 본래 공업학교 화학실험실이 있던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근대 고등교육의 중심적 역할을 했던 공간이기에 관련된 여러 학교의 다양한 역사가 함축돼 있음을 보여주는 편린이다.


공간으로 본다면 개인적으로는 지금은 사진 속에서만 남아있지만, 방송대가 개설되던 즈음 방송대 본관으로 사용하면서 1972년 ‘방송통신대학 개교’라는 플랭카드를 내걸었던 건물이 가장 상징적이라고 보고 싶다. 서울대 부설로 세워졌기에 어디든 공간을 내줘야 하는데 서울대 구성원들은 냉담했다. 당시 의과대 학장이었던 권이혁 박사는 교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 공간을 내주었다고 한다. 아마도 가장 낡고 외곽이어서 선택됐을 듯하지만, 나름 운치가 있고 역사적 의미도 담은 건물이었다.

 

일제시기에 세워진 뒤 여러 용도로 사용됐겠지만, 3·1운동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던 스코필드 박사가 1958년 이후 이곳을 숙소로 기거했을 때 그분이 선발한 장학생 출신이었던 정운찬 전 총리는 이곳에서 자신들이 모임을 가졌다고 이야기했다. 그 뒤 보건대학원에서 사용했기에 그쪽 출신들도 이 건물에 대한 기억이 많을 듯하다. 이 건물의 역사를 생각한다면, 이 건물이 남아있다면, 우리 구성원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는 역사를 되새길 수 있는 좋은 표징이 됐을 것이다.


해방이후 1960~70년대에는 우리 사회가 압축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간 고등교육에서 소외됐던 수많은 국민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새로운 교육정책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방송대가 서울대 부설로 출발했지만, 서울대가 관악산으로 이전할 때 따라가지 않고 이 공간을 차지한 것도 앞으로의 역할에 대한 예정이 아니었을까?


개교 50년을 넘어서 다시 맞은 새학기, 우리에게 놓인 새로운 기회와 전망을 다듬어나가는 지금, 그간 방송대가 지녔던 역사적 자산을 다시한번 반추해보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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