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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대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공정하다는 착각(The Tyranny of Merit)』을 펴낸 마이클 샌델은 『정의: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라는 책에서 스스로 비과학적 통계라면서 하버드대생의 75~80%가 남녀를 불문하고 첫째(아이)라는 이야기를 꺼낸다.


그 까닭은 학생들이 하버드대에 온 것은 그들의 능력 때문만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들 자기가 잘나서 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왜 유독 첫째가 하버드대에 많은가를 물어본 것이다. 왜 그런가? 부모라면 다 안다. 첫째를 잘 기르면 첫째가 둘째를 봐줄 것이라는 희망 말이다. 일단 돈을 쓰더라도 첫째에게 많이 할 수밖에 없다. 우리 교민이라치면 세탁소하고 과일 장사해서 하버드대를 보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그러나 부모는 일단 첫째에게 ‘몰빵’ 한다.


첫째로 태어난 것이 그의 능력일 수는 없다. 첫째라서 받는 기대와 관심이 그의 능력일 수는 없다. 샌델이 말하고 싶은 것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인가 하다못해 ‘집안도 능력’이라는 희한한 말이 떠돈다. 참으로 안타깝다. 그것은 환경이지 능력이 아닌데도 말이다.


자기에게 부여된 속성을 능력이라고 해보자. 예술적 능력과 문학적 능력도 있지만 신체적 능력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재능이라고 부르지, 능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우연히 타고난 것을 능력이라고 부르기는 뭔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좋다. 그것을 능력이라고 부르는 데 동의해도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이 있다. 능력은 단지 하나의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머리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있지만, 발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있다. 공부할 때는 머리가 중요하다지만 호랑이에 쫓길 때는 발이 최고다. 수학보다 달리기가 우선일 때다. 그런데 우리의 능력주의는 오직 하나의 기준에 쏠려있다.


이렇게 말하면 좋겠다. 조화의 능력, 타협의 능력, 포용의 능력, 공감의 능력도 능력이다. 웃기는 능력도 당연히 능력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능력주의는 이상하게도 자본주의와 결부돼 ‘돈 버는 능력’만 능력이라고 한다.


나는 능력을 우선시하는 자본주의조차 평등이 전제된다고 믿는다. 자본주의는 결과의 평등은 받아들이지 않지만, 기회의 평등을 늘 내세우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를 포커판으로 비유해보면 쉽다. 자본주의는 ‘자유롭게 끼어드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누가 끼어드는 것을 막는 것은 ‘반독점법(anti-trust act)’으로 철저하게 제재한다. MS사가 익스플로러를 끼워 팔 수 없도록 한 것이 자본주의의 천국 미국이었다. 자유경쟁을 막는 어떤 행위도 막아 자본주의의 이상과 건전성을 유지하려는 법률적 조치였다. 자본주의는 이렇게 평등을 전제한다(나의 책 『노자와 루소』는 이를 12종류의 포커판으로 다뤘다).


그러나 우리의 능력주의는 어떤가? 학벌이 이른바 상징자본이 되어 그것의 획득으로 일종의 카르텔이 형성돼 이 작은 나라를 파벌로 좌지우지하지 않는가? 나아가 결혼에조차 주요 요소가 되어 카르텔을 넘어 카스트가 되고 있지는 않은가? 독점은 능력일 수도, 공정일 수도 없다.


또 미안하지만, 하버드대 이야기로 마무리 짓는다. 현재 하버드대는 소득수준에 따라 등록금을 완전히 다르게 받는다. 그래서 의사나 변호사 자녀도 입학하지만, 노숙자의 아이도 공짜로 다닌다.


그래서 나는 발칙하게 상상한다. 소득수준에 따라 대학입시를 경쟁시키면 어떨까 하고 말이다. 능력주의는 공정이라는 착각을 바탕으로 소수점까지 점수화된 평가제도를 먹고 살고 있다. 사람은 결코 숫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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