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기 신·편입생 모집이 한창이다. 모집 유형도 신·편입(6.12~7.11), 시간제등록(7.12~7.18), 재입학(6.2~7.4)으로 다양하다. 이 가운데 눈여겨볼 유형이 ‘재입학’이다. 재입학은 방송대 학사과정 제적생을 대상으로 한다. 지난해 중도탈락 학생 비율이 22.06%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이들이 일정 비율로 매해 누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학본부에서 이들을 대상으로 한 ‘재입학’ 안내를 빠뜨리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커버스토리에서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학업을 포기했던 학우들이 다시 방송대에 진학하는 ‘재입학’을 조명했다. 1면에서는 35년 만에 농학과에 재입학해 4학년 1학기를 마친 박원관 학우(66세)를 만나, 그의 뒤늦은 재입학기를 들었다. 2~3면에서는 첫 학과에서 제적됐다가 재입학한 학우와 졸업한 뒤 심화학습을 위해 다시 같은 학과에 편입하고 대학원 공부까지 마친 동문의 이야기 그리고 재입학과 관련된 주요 문의 내용(Q&A) 등을 담았다.
울산=최익현 선임기자 bukhak@knou.ac.kr
울산에 거주하는 박원관 학우가 1986년 처음 농학과에 입학했을 때, 그는 자신이 지녔던 소박한 바람 두 가지를 곧 이루게 될 것이란 생각에 들떠 있었다. 공고를 졸업한 뒤 현대중공업에서 일하던 그에게는 ‘승진’을 위한 4년제 대학 졸업장도 절실히 필요했지만, 이와 함께 고향에서 힘들게 농사짓던 부친을 대신해 제대로 농사를 지어보겠다는 ‘효심’도 크게 작용했다. 온통 영어로 된 밭작물용 농약을 모내기까지 마친 논에다 풀어 한해 논농사를 망친 부친에 대한 염려였다.

방송대는 꿈을 키울 수 있는
희망발전소이자 에너지충전소,
중도에 꿈을 접었던 분들
다시 도전 하셨으면
1987년, 안타까운 사고
그에게 1986년 한 해는 가슴 부푼 ‘새로운 시작’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듬해 하숙집에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심정지 상태를 맞고 울산 시내 병원 곳곳을 전전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숙집 주인 할머니와 이름 모를 택시 기사의 도움으로 그는 ‘골든타임 4분’을 훨씬 넘겨 가면서 병원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병원에선 그에게 ‘사망 판정’을 내렸다. 하숙집 할머니가 의사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려 “살려달라”라고 연신 외쳤다. 가까스로 심장은 뛰었지만, 의식을 되찾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다.
정상적인 신체로도 회사 생활과 학교 공부를 병행하기가 벅차기 마련인데, 회복이 더딘 그의 몸과 의식은 학교 공부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1989년, 결국 제적 통보를 받았다. 그는 이때의 심정을 “엽서로 제적 통보를 받았는데, 눈앞이 아찔하더군요. 정말 깜깜했어요”라고 말했다.
“꿈이 창대하던 젊은 시절의 사고였죠. 중환자실의 의료장비에 의해 식물상태에서 겨우 깨어났어요. 휴학과 복학을 거듭하다가 제적됐어요. 공부하고자 하는 의지는 있었지만, 도저히 일과 공부를 해나갈 여건이 안 됐던 거죠.”
박 학우는 선박과 플랜트 등의 품질관리를 담당했는데, 사고 후 타부서로 전출돼 현장 작업을 맡아야 했다. 희망의 사다리가 갑자기 증발했으니, 그가 방황과 실의에 빠지는 건 불 보듯 빤한 일이었다.
하청업체와 일용직 일터(일명 노가다)를 전전하다가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삶’의 의미를 생각했다. 절망을 딛고 굳건히 사는 게 부모님과 의료진에게 보답하는 길임을 깨달았다. 용접 1급 기능사(현 산업기사) 자격증을 취득해 산업현장에서 능력을 발휘했다. 사회봉사에도 눈을 떠 장애인 돕기 봉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지금도 이 봉사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데, 그간 국무총리 표창, 행정안전부장관 표창, 울산광역시장상 등 수많은 표창과 상이 그를 찾아왔다. 또한, 다수의 실용신안 및 발명특허 등록으로 성취감도 높아졌다.
“재입학 가능하다는 소식 듣고…”
긴 시간이 흘렀다. 주중에는
현장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자수성가로 이룬 2천여평의 농지에서 농사를 지었다. 이 무렵, 직장에서 만난 후배로부터 방송대 재입학이 가능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박 학우의 가슴이 다시 요동쳤다.
“제적된 학생도 재입학이 가능하다는 소식을 듣고 엄청 기뻤어요. 나에게도 재기의 기회가 온 것이죠. 곧바로 울산지역대학 학생지원센터를 찾아가 재입학을 할 수 있냐고 문의했죠. 2021년, 35년 만에 방송대에 재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물었다. 다른 학과에 진학하면 되지 않았냐고. 박 학우는 전혀 몰랐다고 대답했다. 한번 제적됐으니, 다시는 학교에 입학할 수 없는 걸로 알았다는 것이다. 물론 농학과 재입학을 선택한 것은 한번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끝을 봐야 한다는 그의 성격 탓이기도 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농사도 겸하다 보니 농학과로 다시 돌아오게 된 거죠. 학교 공부를 통해 배운 이론을 바로 실습해 볼 수 있어서 좋고, 실습을 해 보니 이게 또 학교 공부에도 도움이 되더군요. 일석이조인 셈이죠.”
35년 만에 돌아온 방송대는 여러 면에서 달라졌다. 변화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늦은 밤에 라디오 방송을 듣고 공부하던 방송대가 아니었다. 출석수업과 시험을 위해 울산에서 경남 진주, 마산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할 필요도 없었다.
“재입학하고 보니 방송대 학습 환경이 너무나 변화돼 있었어요. 학교 홈페이지를 통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든지 교수님과 얼굴을 마주하면서 공부할 수가 있다는 게 놀랍기만 합니다. 워크북을 이용해 학습 내용을 복습할 수 있는 것도 참 좋더군요. 게다가 동기 학우분들과 스마트폰 등을 통해 소통을 편하게 할 수 있다는 것도 공부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더라고요. 공부하다가 궁금한 부분이 있을 때마다 도움을 받고, 바로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체계화돼 있고, 모든 것이 잘 갖춰져 있어서 공부할 의지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환경. 박 학우가 평가한 현재의 방송대다. 좀더 일찍 재입학 했더라면, 누군가가 재입학 기회가 있다는 정보를 조금 일찍 전해줬더라면…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늦었지만 재입학하길 정말 잘했다고 자신을 격려했다.
60대 후반, 소박하지만 단단한 꿈
다시 박 학우에게 그의 삶에서 방송대는 어떤 곳이냐고 물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방송대는 저에게 꿈을 키울 수 있는 희망발전소입니다. 학문과 지식의 소중한 에너지충전소이며, 용기와 자신감을 키워주는 든든한 활력소라고 할 수 있죠.”
그는 지금 울산 중구청에서 기간제로 일하고 있다. 20대 1의 경쟁률을 뚫은 결과다. 방송대 재학 덕이라고 말했다. 재입학한 후 조경기능사, 산림기사 국가자격증을 취득했다. 식물보호기사와 화훼기능사는 필기시험에 합격해 현재 실기시험 날짜를 기다리고 있다. 환경기능사는 최종 합격 여부를 기다리고 있으며, 이외에도 산림기사와 유기농업기사도 곧 시험을 치를 예정이다.
본인의 의지와는 반대로 건강이라는 변수가 발목을 잡았던 박 학우는 학업에 관해서 이렇게 조언했다.
“저의 경우, 오래동안 몸이 아팠는데 결국 원인을 알면 치료가 쉽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공부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학업을 중도 포기한 원인이 무엇인지 그것부터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그에 대한 해법 모색이 쉽지 않으면, 교수님이나 학교 선배, 또는 튜터 선생님 등에게 도움을 구하는 방법도 저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다시 방송대 공부에 재도전한다고 하니 주변에서 ‘나이 들어서 지금 공부해서 무얼 해?’ ‘뭘 하려고 공부하느냐?’라고 물어보거나 비아냥거리는 분들도 간혹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이 무어라 하든 상관하지 말고, 목표를 뚜렷이 하고, 성취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만 있다면, 방송대 생활은 물론, 인생 성공의 역사를 스스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청년의 시간을 훌쩍 보내버린 60대 후반 박 학우의 꿈은 소박했다.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자는 것, 지금 주어진 삶에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이들과 함께 걸어가자는 것. 노을 지는 울산 중구청을 뒤로 하고 환하게 웃고 있는 그에게서 백자 항아리 같은 질박한 향기가 느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