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식물성의 사유로 읽어낸 역사 속의 여성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서양식 사고를 가진 우리들이 마주치는 것들이 미개함이나 윤리의 타락이 아닌, 정교하고 고풍스러운 또 하나의 문명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타락한 것이 아니며, 비록 불완전하기는 해도 우리가 존중하고 감탄할 만한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블린 케이 지음, 류제선 옮김,『이사벨라 버드』(2008) 중에서

앙코르 유적 중 하나인 사진 출처=위키피디아캄보디아의 타 프롬(Ta Prohm) 사원에는 기괴한 나무가 자란다. 실크 코튼 나무인데, 캄보디아에서는 스펑나무로 불린다. 이 나무는 속이 비어서 가구를 만들 수 없고 땔감으로 쓰지도 못하는데 오래된 사원 담벼락을 타고 자라는 거대한 뿌리가 사원을 지탱한다. 이 나무처럼 살다간 여성이 있다. 그의 이름은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Lucy Bird, Isabella Bird Bishop, 1831~1904)이다. 아버지 에드워드 버드는 영국국교회 복음주의 목사였다. 증조부 조지 머틴 경은 런던 시장을 지냈고 사촌인 윌리엄 윌버포스는 노예제도를 반대한 정치인이고 친척 중 2명은 영국국교회 주교였다.
요크셔 버러브릿지에서 태어난 이사벨라는 독실한 기독교식 교육을 받고 자라났다. 여성을 위한 정규교육이 없던 시절이라 어머니 도라에게 역사와 문학, 프랑스어와 회화를 배웠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식물학과 라틴어를 가르쳤다. 그녀는 혼자서 『프랑스혁명사』를 읽고 화학과 생물학을 공부할 만큼 똑똑했다. 15세에는 자유시장과 노동자 보호 문제에 관한 시론을 썼다. 그녀의 삶의 바탕은 기독교 신앙이 견고한 사원이 되어 주었다.
이사벨라는 어려서부터 병을 자주 앓았다. 속이 빈 스펑나무처럼 무력감과 불면증, 척추의 병은 평생 그녀를 힘들게 했다. 우울증까지 앓게 되자 의사는 여행을 처방했다. 산속의 맑은 공기를 쐬라는 ‘공기의 전환’ 치료법이었다. 잠시 스코틀랜드 고지대에 있을 때는 호전됐지만 병은 재발됐다. 그녀의 우울증과 요통과 두통은 심리적 좌절의 결과였다. 그동안 신문 몇 군데에 익명의 글을 실었지만, 당시 여성에게는 아무런 기회의 문이 열려있지 않았다.

 

58세의 이사벨라는 미지의세계를 향한

끝없는 열정으로인도로 떠났다.
인도 여행의 목적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남편과 동생을 기념하는 선교병원을 세우는 것,
또 하나는 히말라야를직접 보는 것이었다.


여행과 책 쓰기, 그리고 방황
의사는 오랜 기간의 바다 여행을 권고했고 22세의 이사벨라는 사촌들이 사는 캐나다로 첫 여행을 떠나 북아메리카를 둘러봤다. 열 시간 동안 배가 흔들리며 침몰할 위험 속에서 3시간 기절했는데, 오히려 이사벨라는 그 속에서 흥분과 삶의 희열을 느낀다. 글재주가 있는 그녀는 『미국에 간 영국 여인』(1856)이란 책을 써서 45판을 찍는 성공을 거뒀다. 이사벨라는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어부들이 새 배를 사도록 인세를 기부했다. 겨우 26세인 그녀는 여행과 글쓰기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웠다. 그것은 평생 이어져 10권의 여행기, 수 십 건의 기사와 2권의 사진 책을 남겼다.
그러나 1858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사벨라는 자신의 여행이 아버지의 죽음을 재촉했을지 모른다는 죄책감과 함께 깊은 우울증에 빠져들었다. 이사벨라의 마음에 뿌리내린 사원은 기독교 신앙이고, 자신의 삶은 사원을 지탱하는 스펑나무처럼 희생의 삶을 사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욕구대로 여행을 다녔고 그것은 신앙에 어긋나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사원을 지탱할 나무인 자신이 오히려 사원을 파괴하게 되면서 아버지의 죽음을 초래했다는 자책은 그녀를 괴롭혔고, 여행을 끊고 아버지의 뜻대로 선행과 봉사에 자신의 삶을 바치리라 결심했다.
이즈음 이사벨라 가족은 왕실 병원 수련의인 존 비숍 박사를 만나게 되어 동생 헨리에타와 함께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12년 동안 이사벨라는 자신의 결심에 충실했다. 그러나 다시금 두통과 요통이 찾아오고 우울증에 덮쳤다. 이제는 침대에 의지해 하루 하루를 지내야 했다. 결국 1872년 여름, 41세의 이사벨라는 오스트레일리아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이사벨라는 여행지에서 하와이의 화산과 해변, 협곡과 급류의 모험, 로키산맥, 콜로라도 사슴계곡과 사랑 등 모든 것을 편지에 담아 동생에게 보냈다. 그녀는 일본으로 떠나 아이누족의 곰 축제를 보고 외부인에게 금지된 신전을 관람했다. 이집트로 향해 시나이 사막 위에 텐트를 치고 오아시스를 경험하기도 했다.

의사 존 비숍과의 짧은 결혼 생활
그녀는 이렇게 지구를 한 바퀴 돈 후, 1879년 5월에 멀 섬에 도착해 1년 만에 자신을 기다리던 동생을 만났다. 헨리에타의 내조를 받으며 그녀는 『로키산맥에서의 한 여인의 삶』(1879)이란 책을 저술했는데, 이 책 역시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그 무렵 동생 헨리에타가 장티푸스에 걸려 존 비숍 박사의 6주에 걸친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46세로 숨을 거뒀다. 이사벨라의 비탄은 극심했지만 이미 여러 번 자신에게 청혼했던 존 비숍에 대한 마음이 자라나 1881년 3월, 50세의 나이에 열 살 연하인 그와 결혼했다.
이사벨라의 자유로운 여행을 지지한 남편 존은 “나에게는 오직 하나의 강력한 라이벌이 있는데, 그것은 이사벨라의 마음속에 있는 중앙아시아의 고산지대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러나 존경받는 착한 의사인 남편은 결혼 생활 8개월 무렵 환자를 수술하다가 독에 감염돼 5년을 고생하다가 1886년 3월, 결혼기념일을 이틀 앞두고 사망했다. 이사벨라는 남편의 죽음을 자책했다. 동생을 잃은 슬픔으로 자신이 결혼식 날 상복을 입은 것 때문이라 생각했다.
이후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의료선교사의 소명을 다하려고 1887년 봄 런던 세인트마리아 병원의 3개월 간호코스에 들어가 공부했다. 1889년 2월, 58세의 이사벨라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끝없는 열정으로 인도로 떠났다. 인도 여행의 목적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남편과 동생을 기념하는 선교병원을 세우는 것, 또 하나는 히말라야를 직접 보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슬라마바드에 남편을 기리는 존 비숍 기념병원을, 바이어스에 헨리에타 버드 기념병원을 건립했다. 1년 후 그녀는 페르시아 여정을 꿈꿨다.
영국 당국은 혹독한 추위와 폭력적인 반기독교 정서, 그리고 거친 유랑 부족민들의 잔혹함을 들어 이사벨라의 페르시아 행을 만류했다. 그러던 중 비밀군사 임무를 위해 페르시아로 향하는 허버트 소여 대령과 동행하게 됐다. 거의 1만 킬로미터에 이르는 이 여행은 높은 페르시아 고원을 넘어 케르만샤, 하밀라바드, 쿰을 거쳐 테헤란에 당도하는 길이었다. 이사벨라와 소여 소령은 비바람을 헤치고 눈 쌓인 고원지대를 넘어 케르만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사벨라가 페르시아 방식으로 베일과 마스크를 쓰고 상점을 다닐 때, 남자들은 그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고함치고 모욕했다.
여행단이 다시금 산을 넘을 때 눈 폭풍이 불어왔고 얼음 눈 조각이 몸을 때리고 눈을 찔렀다. 거센 바람에 눈이 쓸려 들어와 시야도 길도 사라졌다. 이사벨라는 폭풍을 정면으로 받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마을에 도착해서는 앞서가던 대상 무리 중 다섯 명이 눈보라에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의 생각은 이랬다. ‘나는 지금 지치고 감각을 잃은 상태다. 하지만 따뜻한 빗속에서 진흙탕을 걷는 지루함보다는 고난과 흥분 속에 행군하는 것이 더 낫다.’ 다음 날은 날씨가 더 사나웠다. 그들이 2천 미터 높이에 있는 고개의 협곡에 다가갔을 때, 흘러내린 눈물이 얼굴에 얼어붙고 마스크와 입술도 얼어붙었다. 이사벨라는 차라리 눈 속에 누워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으나 의연히 전진했다. 그날도 눈 속에서 세 사람이 죽고 말았다. 이사벨라는 다친 사람들을 간호하며 밤을 지냈다.

영국왕립지리학회 최초의 여성 회원
다음 탐험지인 바크테리아족의 땅에서 이사벨라는 마을 사람들에게 약을 나눠주고 치료했다. 하지만 밤새 트렁크의 돈을 몽땅 도둑맞았는데, 음식과 장비까지 도난당했다. 또한 소여 소령의 강압적 성격으로 바크테리아 족장들과 갈등이 생겨 어려움이 따르기도 했다. 보루제르드에서는 권총으로 위협받았고, 몽둥이와 칼을 지닌 험악한 남자들의 공격도 뒤따랐다. 병약한 이사벨라는 이 모든 역경을 넘어서며 스펑나무 뿌리처럼 꿋꿋하게 지구를 휘감았다. 1892년에는 여성 최초로 영국왕립지리학회(Royal Geogr방송대 농학과에 재학하고 있으며, 성균관대 겸임교수로 가르치고 있다.『식물처럼 살기』,『유학과 사회생물학』,『식물에서 길을 찾다』등의 책을 썼다. aphic Society)의 회원이 됐다.
이사벨라는 이후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을 여행하여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1898) 이란 책을 남겨 한국 정치의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오랜 세월의 여행을 통해 그녀는 당당하고 권위 있는 멋진 리더가 됐다. 1901년, 69세의 이사벨라는 북아프리카 탕헤르에 도착해 말을 타고 모로코의 아틀라스산맥을 달렸다. 이 여행 이후 이사벨라는 심각하게 쇠약해졌다. 심각한 심장병을 앓으면서도 중국 여행을 계획하던 그는 1904년 10월에 친구들의 찬송가를 들으며 73세로 평안히 숨을 거뒀다.

 

 

 

참고문헌
- I. B. 비숍 지음, 신복룡 역주,『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집문당, 1999.
- 막달레나 쾨스터, 주자네 헤르텔 공편, 김경연 옮김,『길들일 수 없는 자유』, 여성신문사, 1999.
- 이블린 케이 지음, 류제선 옮김,『이사벨라 버드』, 바움,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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