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관련 수업을 하면서 종종 언급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최동훈 감독이 제작한 「암살」입니다. 이 영화의 장점은 역사적 인물과 가상 인물들의 적절한 배치, 그리고 공감되는 시대적 묘사에 있습니다. 여주인공이 독립운동의 이유를 설명하는 대사, 조선총독부 고위 관료 암살을 위해 국내로 파견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이 독립운동의 결의를 밝히는 부분 등은 실제 독립운동가들이 언급한 내용입니다.
이러한 내용과 함께 주목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영화에서 최고 악당인 ‘염석진’이라는 인물입니다. 염석진의 이력이 흥미롭습니다. 그는 조선 총독을 암살하려고 했으나 일본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이후 감옥에서 탈출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끈 김구의 최측근이 되어 독립운동을 주도합니다. 그러나 염석진은 독립운동가가 아니었습니다. 독립운동 정보를 일본 영사관에 팔아넘기는 ‘밀정’이었습니다. 일본 경찰에서 풀려난 것도 ‘밀정’이 될 것을 약속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밀정’은 어떤 존재였을까요.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일본군 100명보다 밀정 하나가 더 무섭다”라고 말합니다. 밀정은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생활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내부 정보를 일본 경찰, 혹은 기관 인사들에게 정보를 넘깁니다. 점차 독립운동 진영에는 불신, 의심, 갈등이 조장되고 결국 독립운동의 동력은 상실돼 갑니다. 신주백 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은 이러한 의미에서 밀정을 “(식민지) 지배체제의 모세혈관이자 기획하는 파괴자”라고 했습니다(「신주백의 사연(史淵)」, 〈경향신문〉 2023.5.16,).
밀정은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독립운동가들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면 밀정들은 왜 동지들을 배신하고
일제에 협력했을까요.
2019년 KBS 탐사보도부에서 제작한 「시사 기획 창-밀정 2부작」은 밀정의 존재를 알린 매우 흥미로운 프로그램입니다. 유튜브 등을 통해 쉽게 접하실 수 있습니다. 방학 중에 꼭 한번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이 방송을 보면 밀정이 얼마나 중요한 핵심 정보를 일본 경찰 등에게 제공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1924년에 일본 외무성에서 작성한 문건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키는 6척 1촌 5부. 얼굴은 타원형이고 희다. 눈빛은 형형해 사람을 두렵게 하고 똑바로 바라볼 수 없게 만드는 느낌이 있다. … 간도 방면에 대해서는 왕년에 일본 군대의 출동 당시 패배해 당분간 군사 행동을 취하지 않지만, 의열단장 김원봉과 연락해 올봄부터 단원 10여 명을 보내 일본 영사관의 주요 관리, 친일 조선인 등을 암살하여 민심을 격동시킬 계획이 있다 ….”
글에서 묘사된 인물은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좌진입니다. 김좌진은 북간도 지역의 독립운동을 이끈 핵심 인물입니다. 밀정은 김좌진에 대한 세밀한 모습과 특징을 보고합니다. 밀정의 정보는 수배를 위한 몽타주 작성에 활용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더하여 군자금 모금 책임자와 활동 내용 등을 보고했습니다. 1920년 간도참변 이후 북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동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일제에 알린 것입니다. 이러한 정보는 김좌진의 최측근에서 함께 활동한 인물이 아니고서는 제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밀정은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독립운동가들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면 밀정들은 왜 동지들을 배신하고 일제에 협력했을까요. 영화 「암살」의 마지막 장면에서 여주인공이 염석진에게 왜 동지를 팔았는지를 묻습니다. 염석진의 대답은 “몰랐으니까. 해방될지 몰랐으니까. 알면 그랬겠나?”였습니다. 이 대사는 밀정의 심정을 간결하게 대변해줍니다. 밀정은 일제의 강력한 식민지 통치 앞에 굴복했습니다. 독립, 해방을 꿈꾸던 사람들의 정보를 제공하고 생활의 안정을 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친일 세력은 눈에 쉽게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밀정처럼 은밀하게
활동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해방 이후 친일 청산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조금 있으면 8월 15일 광복절이 다가옵니다. 해방, 광복을 위해 힘쓴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생각하면서 ‘친일’, ‘친일파 청산’ 문제 등도 관심을 가져보시면 좋겠습니다. 즐거운 방학 중에 한국사와 관련된 영화를 보시면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시는 것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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