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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향은 충남 태안이다. 돌아보면 나의 인생길은 참 구불구불했다. 꿈 많던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에 큰형님의 사업실패가 내 인생을 바꿨다.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해서 대학을 가는 게 친구들의 행로였다면, 나는 그 대신 서울에 있는 공업계 고교로 유학 아닌 유학에 올라야 했다. 1973년의 일이다.


1976년 공고 건축과를 졸업하면서 곧바로 방송대 전문과정 경영 5회로 입학했다. 대학에는 진학했지만, 생계를 위해 직업을 구해야 했다. 부산 동명목재 공채 8기에 지원해서 ‘공고 수석’으로 입사했다. 휴직 후 군대에 입대해 제대 6개월을 남겨둔 1981년, 무시무시한 국보위 시절에 회사가 무너지고 말았다.


1982년 방송대 학사 1회로 경영학과 3학년에 편입했다. 본격적인 방송대인의 삶이 시작된 시점이다. 당시에는 서울대에서 출석수업이 진행되던 때였다. 경영학과 학우회 회장에 출마했고, 우여곡절 끝에 회장 권한대행으로 경영학과를 최우수학과로 만드는 데 노력을 불살랐다. 방송대를 졸업하고 곧장 경희대 경영전문대학원에 진학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 시기에 평생의 반려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인생 최고의 선물이었다.


여기까지가 인생 1막이다. 인생 2막은 훨씬 더 극적이다. 1996년 12월 가구제조업 사업을 시작해 10년 뒤에는 연 매출 50억을 이뤘다. 잘 나갔다. 그러나 정점에 올라선 그 순간, 시련이 다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2007년 12월 16일 일요일, 화재로 공장이 모두 타버리고 말았다.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삶의 전부를 쏟아부은 사업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됐으니, 나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화재복구에도 실패하고, 재기의 가능성도 희미해져 갈 때 운명처럼 방송대 리더스클럽의 박인주 회장님을 만났다. 방송대가 다시 보였다. 성공한 기업인들이 모교인 방송대를 위해 무엇인가 할 일을 찾아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그때 갑자기 어떤 깨달음이 가슴과 뇌리를 스쳤다. 나를 만든 것은 내가 아니라 방송대였구나! 방송대를 만나 인생을 바꿨구나! 처절한 실패 속에서 나는 나의 진면목을 발견했고, 방송대라는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을 재발견했다. 방송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게 새로운 삶을 열어가는 데 큰 도움을 줬다.


모교 방송대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마침 올 1월 ‘방송대 50·500 발전기금 모금 프로젝트’ 선포식이 열렸고, 나는 이 프로젝트의 사무총장직을 맡게 됐다. 비로소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은 셈이다. 소명이란 생각도 들었다. 방송대의 새로운 50년을 준비하기 위해 사회수요 맞춤형 첨단 융복합 학과(학부)를 신설해야 한다는 고성환 총장의 말씀에 공감해, 프로젝트 달성을 위해 열정을 불사르겠다고 다짐했다.


총장님과 지금껏 전국을 누비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동문 85만이라고 하지만, 흩어진 구슬이다. 뭔가 중심을 만들고 구슬을 꿰어야 빛날 수 있다. 50·500 발전기금 모금은 눈에 보이는 금액보다도 중요한 게 있다. 전국에 흩어진 동문과 재학생을 서로 잇고, 방송대라는 공동체로 호명해 함께 미래를 만들어가는 일에 동참하는 일이다. 


나는 이번 모금의 성패는 소통과 협력이라고 생각한다. 방관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면서 작은 힘이라도 보태는 게 중요하다. 1만원, 10만원, 100만원 형편되는 대로 동참하면 된다. 국민과 방송대에 혜택을 입은 우리가 앞장서서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우리들의 찬란한 봄날을 위하여 ‘열정’을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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