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
벌어지는 사태가 무엇인가를 돌아봐야 한다.
개인과 가족, 공동체의 가슴속에
사무친 고통과 회한은
결코 타인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의 질서는 기본적으로 평화인가? 갈등(전쟁)인가? 칼 폴라니는 그가 정리한 ‘거대한 전환’을 설명하기 위해 역사적 맥락과 전제 조건들을 통찰력 있게 분석했다.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었던 30년 전쟁(제1·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시장의 질서는 큰 흐름을 차지한다. 시장이 균형의 중심에 나타난 이후 현재까지도 독보적 역할을 놓치지 않고 있다. 평화이건 전쟁이건 국가 간 긴장된 균형 관계의 유지를 위한 시장의 자기조정 역할과 그에 따른 자유주의적 국가 체제, 금본위제에 의거한 체제 간 연결 등 그 모든 것들이 거대한 전환을 만들어내기 위한 에너지의 응축과정으로 이해된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평화와 전쟁은 정치와 경제의 순환 구조에서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나타나게 되는 에너지의 흐름 과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동일한 맥락과 전제로 바라보면 시장의 성장과 지배력은 그 어떤 사회체제보다 강력한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좀 더 깊게 들여다보면,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원칙이 있다. ‘사회가 견지하고 잃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다. 인간 문명은 자연법칙을 따르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을 탄생시키고 축적해 왔다. 신이 부여한 자연의 인간이면서도 발달된 문명으로서의 인간화를 지향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 공동체가 누릴 수 있는, 누려야 하는 문명 혜택의 당위성이자 명분이다.
가톨릭 사제 신분으로 빈민운동에도 참여했던 전 아이티 대통령 아리스티드(Jean-Bertrand Aristide, 1953~ )는 “ 아이들이 배고프지 않아야 할 권리가 사회적으로 합의되지 않은 사회를 과연 인류라 칭할 수 있는가?”라고 전 세계에 호소했다. 소아과 의사 출신으로 칠레 대통령을 지냈던 아옌데(Salvador Guillermo Allende Gossens, 1908~1973)는 15세 이하의 모든 어린이에게 분유를 무상으로 제공하고자 했으나, 다국적 기업 네슬레의 판매 거부로 정책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끝내는 군부 쿠데타로 사망했다. 이익과 경쟁의 합리적(?) 시장이 작동하게 된 사건은 현재의 우리 사회에도 무수히 나타나고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는 2023년 대한민국 사회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떤 것을 해야 하는가? 해야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말하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 벌어지는 사태가 무엇인가를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과 가족, 공동체의 가슴속에 사무친 고통과 회한이 결코 타인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를 운영하기 위해 각 영역에서 시스템이 구축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시스템의 목적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포인트임에도 불구하고 ‘왜, 무엇을 위해, 누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막은 채 구축돼 가는 시스템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그 시스템 구축이 우리에게 설국열차의 침묵하는 구성원이 될 것을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이익과 경쟁은 억압과 불평등의 사회적 현상을 당연시하게 하고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성원들에게 절대적이든 상대적이든 박탈된 현실을 맞닥뜨리게 한다. 그곳이 쪽방촌이 됐건, 공교육 현장이 됐건, 신림동의 반지하방이 됐건 폭우 속 지하차도가 됐건 말이다.
루소는『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가장 자연적인 상태의 인간, 차별과 소외, 절대적·상대적 박탈도 없는 근원적인 인간을 제시한다. 사상가 슬라보예 지적은 말한다.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해야 한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