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삶을 성찰하는 데 필요한 앎,
즉 문화와 교양을 새로이 구축하는 일,
그것이 내가 받아든 하나의 소명이다.
하늘의 별빛이 갈 길을 밝혀주던 복되던 시대는 갔으나,
지상의 불로 길을 찾아가는 이의 고투도
그 나름의 쓰임새는 있으리라
“한국인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라는 이제는 진부해진 진단에서부터 시작하자. 사회의 반응은 크게 다음의 둘로 나뉜다. 하나는 독서율의 하락과 종이책 시장의 축소로부터 한국인의 정신적 쇠퇴를 우려하는 오랜 비관론이다. 반대로 이러한 우려가 독서를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규정한다는 지적도 있다. 전자책과 웹소설, 웹페이지 접속량을 보면 사람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정보와 콘텐츠를 접하고 있음은 분명한 만큼, 종이로 출간된 책만을 기준으로 독서와 지성의 쇠퇴를 논하기는 무리라는 것이다. 후자의 견해가 점차 동의를 얻어내고 있음을 고려할 때, 유튜브 시청과 SNS 활동이 ‘독서활동’에 포함되는 미래는 기정사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구도에는 비어있는 지점이 하나 있다. 애초에 기존의 독서 개념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했던 것일까? ‘전자책 읽기도 독서’라는 데 모든 세대가 대체로 동의하듯, 종이냐 아니냐는 독서의 규정에서 그다지 중요한 쟁점이 아니다. 오히려 초점은 대상 텍스트가 오락성 혹은 즉각적인 실용성과 구별되는 어떤 가치를 담고 있는지, 또 그것의 읽기가 어느 정도 이상의 지적 집중을 수반하는지에 있다. 요점만 말하자면, 단순한 읽기·지식습득과는 달리 특정한 규범적 상태로의 상승을 가능케하는 ‘수련’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전통적인 독서행위다. 교양시민은 그러한 독서=수련의 지향점 중 하나다.
다수의 인문사회 전공자를 포함해, 한국인은 교양이란 말을 대체로 전공에 대비되는 예비적 지식, 혹은 ‘대중교양’이란 말에서처럼 취미에 가까운 비전문적 앎을 가리키는 용도로만 사용하곤 한다. 하지만 그것이 기원한 서구 근대에서 교양은 훨씬 풍부한 함의를 간직한 개념이다.
예컨대 교양은 야만·미개와―‘교양없는’―대비되는 문명화된 상태, 또는 그에 도달하기 위한 경로를 가리킨다. 그것은 시민, 즉 사회·국가의 구성원에게 요구되는 역량과도 닿아있다. 교양은 한편으로 시민이 다른 시민과 소통·협력하기 위해 갖춰야 할 기본적인 예의범절·앎을 지칭하며, 다른 한편으로 본인이 소속된 사회의 통치와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적극적인 정신적 역량을 뜻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교양시민의 인간형은, 그저 높은 학력이나 풍요로운 삶의 향유를 넘어, 문명사회를 이끄는 시민으로서의 탁월성을 전제한다.
교양시민의 이념은 우리의 정신세계에 미미한 영향만을 끼치고 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좋다’는 자유주의적 태도의 확산 이래, 무엇이든 긍정적인(positive) 규범적 가치를 논하는 것은 촌스럽고 억압적인 태도와 동일시되고는 한다. 민족과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된 숱한 폭력을 돌이켜보면 그러한 경계심은 이해할 수 있으나, 나는 이제는 우리가 유행을 거슬러야 할 때가 아닌지 묻고 싶다. 금전적 성공 외에 삶의 다른 목적에 대한 언어가 공론장에서 거의 사라졌고, ‘소비자’의 자격으로 문제적 인간을 린치하는 부정적인(negative) 윤리만이 남은 오늘날의 황량한 도덕적 풍경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좋은 삶이라는 목적에 관한 논의 없이 비판과 징벌만으로 세상을 개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문화교양학과에서 가르치
게 됐음을 전할 때, 도대체 무엇을 연구하고 가르치는지 묻는 이들이 종종 있다. 당연한 질문이다. 우리에게 문화와 교양의 개념은 주어진 전통이 아닌, 앞으로 다시 발명돼야 할 것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서구가 지금까지 쌓아온 역사를 바라보며 우리를 위한 좋은 삶을 성찰하는 데 필요한 앎, 즉 문화와 교양을 새로이 구축하는 일, 그것이 내가 받아든 하나의 소명이다. 하늘의 별빛이 갈 길을 밝혀주던 복되던 시대는 갔으나, 지상의 불로 길을 찾아가는 이의 고투도 그 나름의 쓰임새는 있으리라.






